...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1964년 4월, 쿠데타가 일어났을 무렵에 브라질의 외채는 25억 달러였다. 그로부터 21년 후 군부독재가 종지부를 찍었을 때 외채는 1천억 달러를 넘어섰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지속되어온 군부독재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군정체제가 추구한 전략은 '국가의 치안'과 '통합 발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거의 남미대륙 전체 에 걸쳐 대대적인 감시와 억압, 민주주의자 색출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재원이 필요했다. '국가의 치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용도 지나칠 것이 없었다. 초기에는 수출입은행, 거대 민간 은행들, 그 뒤를 이어 국제통화기금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억 달러씩 지원함으로써 독재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필요한 자금을 댔다.
대대적인 국토 확장, 국토 재무장, 독재의 주역인 육·해·공 3군의 재정비와 현대화 작업 등을 위해 공적 자금은 물론 북미 민간자본들이 수백억 달러씩 투입되었다. 이 돈들은 수출입은행과 민간 은행, 국제통화기급 등을 통해 브라질로 유입되었다.
한편 '통합 발전' 전략은 도로망 건설과 신도시 건설 등을 통해 브라질의 인구 저밀 지역을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서 첫 번째로 선정된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열대삼림 지대인 아마존 강 유역이었다. 아마존 강 유역은 무려 6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군부독재가 계속된 21년 동안 10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삼림이 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이렇게 해서 얻은 땅의 90퍼센트 이상은 거대 다국적 농가공 식품업체나 목축업체들에게 분배되었다. 삼림은 불태워 일군 땅 위에 북미 농가공 식품업체나 거대 다국적 목축업체들은 방대한 고무나무나 캐슈, 밀 농장들, 혹은 조방 농법에 따라 소를 기르는 데 필요한 초지 등을 건설했다.
수십만 명의 보이아 프리우들과 무농지 농업 노동자들이 북부나 북동부의 황폐한 지역으로부터 파라, 아크리, 론도니아 등의 아마존 인근 지역으로 실려왔다. 이들은 거의 반 노예상태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도로와 신도시 건설, 삼림 벌채, 노동자들과 식솔들의 이송과 정착, 기반 시설 건설, 거대한 댐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에 필요한 경비는 물론 외국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부채는 브라질 정부가 자국에 정착한 다국적 기업들에게 브라질 내에서 얻은 이익과 로열티의 본사 송금이나 그 외 재정 부문에 대해 지나치게 좋은 조건을 수락한 탓에 한층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9년 말 미국은 급작스럽게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러자 브라질에 위기가 닥쳤다.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해 군부는 다시금 미국의 민간 은행들, 특히 시티은행으로부터 외채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1979년과 1985년 사이에 군 장성들이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황 명목으로 송금한 총액은 이들이 새로이 얻은 외채보다 210억 달러나 많았다.
1985년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 호세 사르네이가 정보부 수뇌 출신 마지막 군부독재자 피게이레두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는 보통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ARENA(군인들이 설립한 정당)에 의해서 지명된 대통령이었다. 호세 사르네이 대통령은 부채 상환의 잠정적인 연기를 명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은 다시금 지옥 같은 부채의 기제에 휘말렸다. 부채를 갚기 위해 다시 부채를 얻어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부채를 한 번 얻을 때마다 상환 조건이 나빠졌으므로, 브라질로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계속 빠져들어가는 형국이었다.
브라질이 상환한 270억 달러라는 액수는 브라질리아 국고에서 나온 돈이다.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동안 고금리 정책을 고집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고, 또한 정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최대한 많은 자본을 브라질 국내로 끌어들어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금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금리였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았다. 이 고금리 정책은 브라질 국내 경제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지나치게 높은 금리 때문에 브라질의 중소업체 대표나 자영업자, 상인들 가운데 기업 확장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감히 은행 대출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이미 대출을 얻은 기업들(또는 부동산)조차도 기업 활동을 축소하여 재무구조를 건정하게 만들어야 했고, 따라서 사무직원이나 노동자 수를 줄여야 했다.
고금리 정책은 또 다른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 투기를 부추긴 것이다. 국내외 투기자들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10퍼센트에서 12퍼센트의 금리로 개인적인 대출을 받아, 천문학적인 금리를 보장하는 브라질의 국채를 사들였다. 지불 불능 사태에 대비해서 반드시 들어야 하는 보험을 계산에 넣더라도, 이는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땅 짚고 헤엄치기 식 돈벌이였다.
오늘날 브라질의 외채는 뱃속에는 기생충이 들꿇고,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며, 돌아갈 가정도 없어 절망 속에서 거리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어린이들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난 본드를 피워요. 나한텐 미래의 삶이라는 게 없거든요." 헤시피의 카르무 수도원의 계단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아이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 나에게 항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장의 신뢰'라는 표현이다. 국가 또는 국민은 세계화된 자본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지 않기 위해서, 자본 앞에서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경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뢰란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 걸까? 몸과 마음과 정신 모두를 바쳐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니 오로기 그렇게 할 경우에만 수치의 제국을 움직이는 제후들은 프롤레타리아를 도와주는 은혜를 베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그림자가 집단 상상력을 좌우한다. 그의 유령은 브라질리아의 플라날투 대통령 궁에서도 배회한다.
구리 광산 국유화(특히 지구상에서 가장 큰 노천광산인 추키카마타 광산), 인민연합이 제시한 110가지 사회개혁 프로그램 추진, 거대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법인세 신설 등의 정책을 통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대 말부터 이미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았다.
워싱턴에서는 비밀리에 40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다국적 기업이 인터내셔널 텔레폰 앤드 텔레그라프(ITT)의 회장 그린이 주도한 이 위원회에는 칠레에서 활동 중인 40개의 가장 중요한 회사들이 참여했다. 아나콘다와 케네코트 같은 광산 연합 외에 전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기업 연합들의 상당수가 참여한 셈이었다.
1970년 말부터 닉슨과 키신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이 위원회는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과 금융개혁 체제에 번번이 반기를 들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도심에 자리 잡은 모네다 대통령 궁은 펜타곤의 조종을 받는 전투기와 무장 장갑차들의 공격을 받았다. 오후 2시 30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궁 2층에 자리한 그의 집무실에서 머리에 총을 한 방 맞은 채로 숨졌다. 그 후 들어선 독재정권은 피비린내 나는 억압 정책을 펴나갔다. 칠레에 길고 긴 어둠의 나날이 찾아온 것이었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브라질, 혁명은 계속된다'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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