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작업 활동
1981년~ 1986년 페이스 The face의 아트 디렉터로 근무하면서 펑크 Punk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전개하여 독창적인 활자체의 개발, 관습적 타이포그라피의 개혁, 혁신적인 레이아웃 등을 통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 1987년 City Limits라는 런던 주간 가이드 표지 디자인을 했다. 1985년 런던에 그의 스튜디오를 열었으며, 1987년에 아레나(Areana)에 합세, 다시 한 번 혁신적인 편집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후 "브로디 현상"으로까지 불리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1988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네빌 브로디의 그래픽 언어(The graphic Language of Neville Brody, 1988)라는 저서가 간행되었다.
1989년~1992년 독일의 템포 (Tempo), 프랑스의 악투엘 (Actuel), 이탈리아의 ''렐 앤 퍼 퓌 (Lel and Per Lui)의 잡지사에서 그의 뛰어난 타이포그라피를 보였다. 그리고 실험 글자 type 잡지인
1994년
작업 스타일
1. 텍스트를 무시하고, 북잡한 이미지를 만들어 냄.(아상블라주-지푸라기, 폐품 등을 이용한 기법-작품들)
2. 활자체의 깔끔한 선을 부각시켜 소용돌이 모양으로 돌아가는 이미지를 텍스트에 채움.(이미지와 활자 모두 사용하기 시작)
3. 글자를 비틀고 폰트를 뒤섞었으며, 부호들을 기발한 방법으로 사용 (현란한 그래픽 등을 사용하여 포스트 모던한 활자체를 만들어 냄)
시대에 저항하는 기하학적 실험 작업
미묘한 형상들이 제공하는 난해성, 그러면서도 외면해 버리고 싶지 않은 독특한 작품 세계의 연출, 이것이 바로 젊은 작가 네빌 브로디가 던져주는 매력이다. 타이포그래피의 시대적 한계성을 감지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독특한 언어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타이포그래피 그 자체가 갖는 어려움일 수 있다. 오늘날처럼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차원에로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네빌 브로디가 던져주는 창조성의 빛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그래픽디자인에 대해 전문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네빌 브로디의 작품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묘한 파편 모습의 난해성은 접근하기 어려운 수렁으로서 우리 앞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빌 브로디의 작품들을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쳐 버릴 순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이미 첫눈에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는 적잖은 파문을 던져주는 까닭에 그러하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그래픽 디자인의 획을 향해 확고히 정진, 이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본질적인 각성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방법론을 대거 출현시켰다. 우리는 뛰어난 <데 스틸(De Still)>사진작가 피에츠바르트(Piet Zwart)의 엄격하면서도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디자인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이미지의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메시지다."
그는 1928년 예술을 통해 세계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시도에서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는 "모든 시대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반역을 생산하는 요건을 지니고 있다"며 네빌 브로디의 혁명적 작품의 필요성에 대해 논평을 가했다. 타이포그래피만큼 전환기적 흐름과 단절되어 있는 분야는 없다. 캐롤링 왕조 시대의 소문자 발명은 서체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더 이상 형태의 본질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딕에서 르네상스, 이탤릭, 게르마닉, 그리고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로마자와 딱딱한 산세리프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단순한 장식의 변화로 일관된 흐름을 타고 진행되었다. 국제적으로 동일화된 평범한 서체와 자연스럽게 흘려 쓰는 흘림체의 경향이 있었고 흔치 않은 일로 가끔 관념과 리듬을 깨뜨린 기하학적 형태가 나와 당혹감을 안겨주었을 뿐 실지로 새로운 글자체의 격변은 없었다. 심지어 단어 (word) 자체가 사인으로 취급되었다.
규칙이란 근래에 등장한 강박관념이다. 앤톤 스테노브스키(Anton Stenkowski)를 시초로, 그 다음엔 신 그래픽 그룹이 구조적 그래픽을 산업적 커뮤니케이션에 적용시켰다. 조세프 뮬러 브로크만(Josef Miiler-Brockmann)의 구성적 그리드는 부자연스런 알람 시스템의 부분들을 구체화시켰다. 하지만 규칙을 내세운 부적당한 경우가 발생할 때마다 중지되었다.
얼마동안 그래픽 디자인은 그 원리와 기준에 캘빈주의를 적용, 금욕적이고 엄정한 논리에 의존해왔다. 때문에 그것은 종종 창의성과 신선미를 상실한 형식적 복잡함으로 시대를 역행해 왔다. 이는 방법론적 통일성과 어떤 면에서는 의도의 통일성 문제이다. 그 시대가 다양한 경험의 전이, 수많은 요구조건의 제시, 확고한 감성, 사용 언어의 상이함, 그리고 불필요하게 상호 공격적이고 무의식적인 새롭고도 흥미 있는 시각적 형상들을 도외시해 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도외시된 한 경우가 바로 영국의 새 세대로 가장 잘 알려진 청년 브로디이다.
그의 독특하고 비범하면서 복잡함과 난해함이 서로 얽힌 작품엔 여타의 시대에 대한 도전과 침략의 느낌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서체로 마치 "칼날 위를 달리는 사람"과 같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타이포그래피는 의도적으로 추한 중간색 또는 형태를 결여한 독소적인 모습의 단어를 사용한다. 즉 만자와 화살의 교차 사인, 터무니없는 독재자의 심벌 같이 그려진 마크 등으로 이 모든 것들은 먼지와 쓰레기들을 전달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과도한 표현이긴 하지만 문화적 흐름, 즉 은둔적으로 당대의 그래픽 작업에 있어서의 예술적 아이디어만 조직하려는 기성세대의 성향에 반발하여 진실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문화적 모델에 의해 진실성을 상실한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행동에 의한 자극 받음으로써 틀에 박힌 구세대의 작업에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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