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의식과 무의식: 정신분석학과 무의식 세계의 탐험

의식(cum-science; 지식과 함께)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아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의식은 나의 모든 경험을 수집하고 통일시키는 빛이다.

1. 의식과 무의식

* 무의식의 부정

심리적인 무의식이란 개념은 일인칭 심리학에는 있을 수 없다. "일인칭 심리학"은 내면적인 생활 현상들이다. 이 방법은 자 자신의 의식 상태에 대한 자 자신의 내면적인 관찰 즉 내성(introspection)일 수밖에 없다. 비랑(Maine de Biran)에 의하면 "심리학에서 관찰(observation)은 명상(recueillement)일 뿐이다." 대부분 무의식이란 생리학적이다. 이성주의자인 데카르트에서도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무의식은 무시된다.

* 무의식 = 무의식적 행동

사실 심리학이란 행동과학(science de comportement)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을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연구한다. 이 실험의 결과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하는 무의식적 행동을 통하여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무의식)이 있음 안다.

1) 지향성으로서의 의식

의식 자체는 이미 행동을 구성한다. 의식은 나를 세계로 향하게 하는 방식이며, 훗설(Husserl)은 원심적 방식을 "지향성(intentionalité)"이라 하였다. 즉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이런 훗설의 의식은 "의식의 상태(état de conscience)"가 아니라, "상태의 의식(conscience d'état)"이다. 의식의 상태가 의식의 위상적 기능(fonction)인 지각, 추억, 감동이라면, 상태의 의식은 어떤 작용 능력(faculté)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초롱꽃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지각의 상태가 전자의 경우라면, 이 꽃에 대한 미적 의식과 사랑의 의미를 지닌 의식은 지향의식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초롱꽃은 시적 의미를 지닌 어떤 것으로서 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 이론에서 모든 지향성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 [본질 직관]

2) 선택(selection)으로서의 의식

의식이란 기본적으로 선택이다. 자동적 습관에서 안될 때 의식은 등장한다. 의식은 현재, 실재,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

삐에롱(Piéron 1881-1964)은 인도의 설화, 두꺼비와 지네의 설화를 예로 든다.

쇼샤르(Chauchard)는 "수면 중에 의식을 상실하는 것은 무관심의 반응이다"

베르그송(Bergson)은 "모든 의식은 선택을 의미한다." 의식은 현재, 실재,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3) 종합으로서의 의식

* 종합도 없고 심리적 긴장도 없는 무의식

쟈네(Pierre Janet, 1859-1947)에게서 의식은 종합이다. 그는 샤르꼬(Jean Martin Charcot, 1825-1893)의 지도하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였다. 환자들의 무의식적 현상(기묘한 방심의 상태)은 정신적 에네르기의 손실, 정신적 긴장의 실패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의식은 지식을 지닌 역할, 종합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무의식적인 자동현상의 증대는 인격 분열, 정신적 종합능력의 실패, 의식의 세심한 통제력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한다.

4) 행동의 의미는 무의식일 수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의식하면서도 이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수가 잇다.

보두앵(Charles Baudouin)은 "무의식은 의식을 채우고 넘친 행동의 나머지이다" 무의식은 내 행동에 대한 나의 소박한 설명과 그 행동의 참된 의미 사이에, 나의 맹목과 타인의 명확함 사이에 있는 간격(la distance)이다.

라로슈푸꼬(La Rochefoucauld, 1613-1680)는 "이기심(amour propre)은 자기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기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애정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으며, 사랑과 증오를 너무 기괴하게 키웠기 때문에 그가 그것들을 드러나게 하고서도 그 자신이 그것들을 무시하고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마르크스(Marx 1818-1883)의 예, [La lutte de classes en France, 1849-1850, Le 18 Brumaire de Louis Bonaparte, 1852, Guerre civile en France en 1871]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은 협동조합의 폐지를 준비하였다. - 이는 부르주아들이 노동계층을 창출할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오를레앙 파(홍백청의 삼색기)와 부르봉 왕가(백색기의 백합문장)의 대립에서는 상업자본가와 전통적 봉건 지주사이의 대립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명확한 의식이 이기심에 의한 자기이익(라로슈푸꼬)차원이나 사회 경제적 차원(맑스)의 무의식적 요인에 의해서 신비스럽게 조작 될 수 있다. 이점에서 이들은 정신분석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참조* 1789 대혁명, 1792 제1공화국, 1799 쿠데타, 1804 제1제정, 1814 루이 18세, 1824 샤를 10세, 1830 7월 혁명: 루이 필립, 1848 2월혁명: 제2공화국, 1852 제2제정, 1870-1940 제3공화국, 1871 파리꼬뮌]


2. 프로이트(1856-1939)의 방법: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탐구

1) 프로이트와 브로이어(Breuer, 1842-1925)의 카타르시스 방법(méthode cathartique).

1881-1882년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21세의 처녀환자(Anna O)를 관찰하였다.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Etudes sur l'hystérique, 1895)에 사례발표]

1885년 프로이트는 파리의 샤르꼬의 강의를 듣다.

[『정신분석운동 역사에 공헌(1914)』에서 "Rp. penis normalis, dosim repetatur"]

1889년 프로이트는 베른하임(Bernheim, 1837-1919)의 최면술 실험에 참여하다.

우선 최면술을 사용하여 카타르시스적 방법을 사용하는 시기이다. 이 방법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던 기억을 되찾을 때, 즉 무의식적인 것이 다시 의식적인 것이 될 때 정신 상태는 혼전된다.

2) 정신분석학적 치료

비인간적인 기술인 최면술과 다른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의 방식은 환자를 잠재우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관심사와 기억을 환자 스스로 찾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약물이나 다른 충격 등을 사용하여 손님의 내면을 표현하게 한다. 이런 방식은 최면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저항을 낳는다.]

자유연합(L'associatin libre)의 방식은 환자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무삭제하게 하고, 자동적으로 상기하다보면 무의식적 관심사가 실제로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재료로서 꿈을 분석한다. 환자는 자신이 밝히고 싶지 않는 것에 대해 저항(résistence)한다. 분석가는 환자에 침입하여 억압되어 있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 [이 주제가 어린 시절의 성관심(sexualité)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성 관심에 관한 세가지 시론(Trois essais sur la théorie de la sexualité, 1905)을 쓴다.] 꿈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이런 억압된 주제를 찾을 수 있다. 말실수(lapsus), 하려다 만 행동(manques actes)등도 꿈과 마찬가지로 의미 있다. [말실수의 예로서, 의회의장이 개회선언에서 "이제 폐회를 선언합니다."고 한 경우이다.] 프로이드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무의식의 탐구의 왕도로서 꿈을 강조한다.

* 꿈, <무의식탐구의 왕도>: Interprétation des rêves 1900.

꿈에 대한 설명을 형이상학적으로 그 다음에 생리학적으로 설명했으나 프로이드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꿈의 특징은 불합리하고 무질서하며 정돈되지 않은 혼돈이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이 꿈이 인간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고 나의 꿈은 나와 관계가 있고 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꿈은 잠을 보호하는 잠의 파수꾼(le gardien du sommeil)이다. 깨어 있을 때는 무의식적이 던 욕망이 꿈속에서는 충족된다. 그래서 "꿈은 욕망(소원) 성취(accomplissement de desir)"이다. [이 시기에 프로이드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출현하는 현관이 있고 이 현관에는 문지기가 있다. 이 문지기 때문에 무의식은 변장하여 통과한다고 보았다.]

프랑크(Flinck)의 예. 환자(부인)는 백화점에서 대단히 비싸고 색깔 있는 검은 아주 아름다운 모자를 사는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한다.

* 전이 (transfert)

예를 들어 " 당신의 병적인 소심증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너무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은 계속해서 당신을 억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당신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으며,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분석에 환자는 의사에게 - 자기도 모르게 - 아버지를 대하던 옛날의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재현한다. 이는 환자가 의사에게 아버지에게 하던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환자가 사랑 또는 증오를 원래 대상을 바꾸어 치장하는 것을 전위(déplacement)이라 한다. 치료장면에서 환자가 대상을 의사에게 투영되는 경우를 (감정)전이(transfert)라 한다. 이 전이를 통하여 치료가 가능하다. 전이는 옛날에 있었던 심리적 장애를 다시 활동시켜서, 자신을 억압한 관심거리를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찾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3. 심리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공헌

1) 갈등(conflit)의 역할

쟈네(Janet)는 무의식이 에너지의 고갈, 의식의 약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억제(inhibition)는 고갈 때문이 아니라, 기능정지(blocage) 때문에 생겨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달비에(Dalbiez)의 석탄이 떨어진 기관차의 정지와 두 기관차의 충돌에 의한 정지의 비유는 흥미롭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refoulé) 있는 욕망과 사회 도덕적 요청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고 보았다. 의식에는 세 가지 위상, 무의식, 자아, 초자아가 있다. 중간층은 서로 모순된 압력을 받고 있다. 아래에서는 본능의 충동(pulsion)이 올라오고 위에서는 도덕적 검열(censure)이 내려온다.

도덕적 금지(interdit) 전체가 초자아(sur-moi)라는 것을 구성한다. 그러나 흥미 있는 것은 이 초자아의 기원도 본능적이라는 점이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어머니의 금지를 받아들이고 복종한다. 어린이는 금지을 '내면화'시키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초자아를 구성한다.

초자아는 도덕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에 필요한 단계이지만, 초자아를 도덕적 의식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실 자신의 도덕적 의식 속에 '초자아'밖에 없는 사람은 유아기의 금지 상태에 머물고 있고 도덕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어린애와 같은 사람이다.

초자아는 정신분석학자가 연구하는 행동장애, 감정장애, 노이로제 등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환자의 경우 억압된 본능은 복수하고(se venger), 여러 가지 심리적 장애를 일 으키면서 상징적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콤플렉스가 형성되어 환자의 심리적 균형을 파괴한다.

2) 의미(signfication)의 개념

플링크(Flinck)의 한 환자는 모자, 수표첩과 같은 무의미한 대상을 보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이 환자에게서 동생이 흘린 피에 대한 강박관념(obsession)은 상징적인 형태인 붉은 색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가는 무의식적 강박관념의 의미를 밝힌다. 예를 들면, 식욕부진환자의 경우 무의식적 단식투쟁으로, 최전방의 병사의 마비증상의 경우는 의식적 자행 행위와 동일한 가치가 있는 무의식적인 행위이다.

반성적 사유의 논리적 과정만을 인정한 데카르트와 달리, 프로이트는 꿈, 정념, 노이로제 증상에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3) 인격형성에 있어서 유아기의 역할

워즈워드의 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사건들이 성인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손자는 할배의 모습을 모방한다.] 유아기의 심리적 충격(traumatisme), 즉 어린애와 부모와의 초기관계는 환자의 반응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재료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보면 나란 나의 이야기(역사)가 나를 만든 것이고, 나는 나의 과거이다. 치료란 과거를 명확하게 의식하고 과거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즉 치료되면, 환자는 자신의 과거가 더 이상 아니고, 한 과거를 소유한다(il a un passé). ,

4) 성본능(성관심, sexualité)의 중요성

억압(refoulement)의 주제는 주로 성생활에서 나온다. 프로이트는 콤플렉스의 근원에는 항상 성에 대한 억압이 있다고 보았다. 리비도, 성본능의 의미는 광범위하며, 관능(sensualité)이라는 의미와 비슷하다. 이 성본능의 발전과정은 구강기(buccale), 항문기(anale), 외디푸스기(oedipienne, phalique), 잠복기(latante) 그리고 사춘기(la puberté)로 나눈다.

프로이드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모방하고 아버지를 대신하려 하지만 어머니에게 자신을 고착시키고 아버지를 질투하고 아버지를 공격하려는 것을 말한다. 콤플렉스는 애정(affection)과 관능(sensualité)의 균열이다. 이 둘을 화해시키기 어려우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렇지 못하고, 어린 시절의 고착(fixation)현상에 머물면 성도착(inverti) 또는 성퇴폐(perverti)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과 발이 부은 자]

5) 정신분석학과 언어학

라깡(Lacan 1901-1981)은 치료에서 작업의 근거는 "환자의 말(sur la parole du patient)"이다. 환자는 자신의 갈등(conflit)을 이야기로 바꾸는 사람이며, 분석가는 꿈과 증상(symptême)을 해독하며, 잠재적 의미화(signification latente)를 찾는 번역자이다. 억압된 주제는 다른 곳에서 다른 장부에 암호로 된 비밀 언어로 되어있다. 그래서 정신 분석적 치료라는 것은 환자에게 탈락되 부분이 없는 "가득찬 말(une parole plaine)"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그는 꿈과 증상의 메카니즘이 "언어(langage)구조와 동일한 구조이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언어 속에 나타나는 구조와 동일한 구조이다"고 한다. 꿈과 증상에 나타난 이미지는 상징적이다. 무의식 특유의 상징화 방법은 담론의 문체론적(stylistique) 방법과 동일하다. 그래서 라깡이 말하는 수수께끼(rébus) 즉 무의식은 "수사학적 모습(figure de rhétorique)"과 같이 비유적(analogue) 모습으로 표현된다. 꿈속에서 응축(condensation) 방법은 비유(métaphor)로, 전위(déplacement)는 억제된 주제의 조심스런 전환(transposition)으로 된다. 전환의 두 가지 방식은 환유(métonymie)와 제유(synecdoque)가 있다. [집을 자궁 또는 동굴로, 집을 가정으로, 집을 부엌으로 묘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구조주의에 대하여 실존(existence 현존) (ms 04/01/01)에서 부록 반실존주의와 현대구조주의를 참조하기 바람]


4.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

1)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의 <열등 의식론>: 1911년 프로이드와 결별

프로이드가 억압에 의해서 설명한 것을 아들러는 열등의식과 보상심리에 의해서 설명한다.

바이런(Boyron)의 엽색 행각도 그의 신체적 결함(안짱다리)을 보상하려는 욕구 때문이며,

스땅달의 작중인물도 열등 의식론을 설명하는 좋은 예이며,

프로이드는 야심의 표현을 성적 억압에 의해서 설명하지만 ("영광, 즉 행복에 넘친 장례식"이라고 말한 스틸 부인의 경우와 같은 성적 억압) 아들러는 정신분석하면서 사랑에서 좌절된 야심의 보상을 발견한다.

2)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의 이론: 1913년 이후 프로이트와 결별

(Métamorphoses et symbole de la libido, 1912), (Types psychologiques, 1921)

a) 성격학적 구분

프로이트가 참조한 것은 주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로이드의 경우에는 "환자는 신기할 정도로 무의미하다: 환자는 단지 쾌락에 대한 갈망의 원천이며 불안을 연출하는 무대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러의 경우에는 "강조점이 환자에게 있다. 환자는 자신을 안전하게 하고 대상과 사물을 지배하려한다."

융(Jung)은 "인간의 두 가지 유형" 즉 자신보다도 대상에 더 집착하는 유형과 대상보다는 자기자신에 더 집착하는 유형이 있다. 전자를 외향적(extraverti)유형이라 하고, 이런 사람의 운명은 인생의 도정에서 만난 "대상들[벗, 적들]"에 의해서 실제로 좌우된다. 이 환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적합하다. 후자를 내향적(introverti) 유형이라 한다. 이 유형은 "설치지 않고 사색적이고, 잘 망설이며, 대상을 잘 피하고 어느 정도 방어적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는 아들러의 개념이 적합하다.

b) 우리의 무의식은 신화적 주제, 신과 악마, 거인, 마술사, 늑대로 둔갑한 요술쟁이 등에 사로 잡혀있다. 이들 속에서 이미지들의 원형(archétype)을 발견한다. 즉 무의식은 "역사적인 집단 혼"에 젖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은 각자가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갈등의 흔적뿐만 아니라, 더 멀리 인류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체험한 불안의 흔적도 있다. [이 원형은

animus와 anima로 되어있다. 이원형의 제대로의 발현이 올바른 삶이다.]

5. 무의식 탐구의 현대적 방법

투영 테스트

투영(projection)이란 의미를 프로이드가 『토템과 터부(1913)』에서 '우리가 외부세계를 지각할 때, 우리는 이 지각 속에 우리의 내적 감정, 개인적인 생각들을 "투영한다"고 말한다. 이런 투영의 메카니즘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1) 투영적 해석

a)로르샤흐(Rorchach 1884-1922)의 테스트, [융의 영향을 입어 4가지 성격구분]

스위스 정신과 의사의 정신적 진단법의 "재료"는 잉크 자국이 그려진 열장의 판지이다. 일곱 장은 검은색 자국을 내고, 다름 세 장은 여러 가지 색깔을 배합하여 자국을 내었다. 외향적과 내향적, 생동감과 폐쇄적인 성격을 구분한다.

b) 머레이(Murray 1892-)의 테스트

미국의 투영 실험 교본의 판지는 서른 장으로 로르샤흐의 실험 재료보다 더 구조화 되어있다.

c) 죤디(Szondi 1893-)의 테스트 [헝거리 정신분석가]

이 테스트의 재료는 열 개의 그룹으로 된 사진이다. 초자아가 인정하는 성향과 억압된 성향을 구별하는데 쓰인다..

d) 로센즈베크(Rosenzweig 1907-)의 욕구불만 테스트 [미국 심리학자]

이 테스트의 재료는 24장의 그림이다. 요구불만 상태에 있는 두 경우의 표현을 상상하여 대답한다. 깨진 화병이 있을 경우 "참을 수 없는 일이군! 너는 나의 어머니가 가장 아끼던 화병을 깨뜨렸어" -한편에서는 "네가 이 화병을 보다 안전한 자리에 두었어야 하지 않았니!" - 다른 한편에서는 "정말로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군. 내가 그것을 변상할 방법이 있겠니?"

2) 투영적 행동과 구성

a) 모레노(Moreno 1892-1974)의 심리극

환자는 그림의 해석을 통해서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투영한다. 환자는 자신의 배역을 맡아서 자신을 투영한다. 환자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연출하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심리학자에게 노출시키고 그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다.

b) 놀이 기술

놀이에 의한 투영방법은 주로 어린이들의 심리 분석을 하는 데 사용한다. 아르투스(Arthus)의 "마을 테스트"가 대표적 예이다.


결론:

도덕의식(양심)과 초자아를 혼동하고 있다: 예술작품을 억압된 본능의 승화로 환원시켰다. (괴테(Goethe)는 자살하고 싶은 성향을 승화시키려고 베르테르를 썼으며, 우트릴로(Utrillo)는 주위 사람들이 술을 못 마시게 하자, 자신의 화폭을 카페의 전면으로 가득 채워놓았고; 반 앉은뱅이였던 뚤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은 우아함과 운동의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또 무용수들과 곡예사들의 유연하고 민첩한 다리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보상하려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단적 강박 노이로제"인 종교적 신앙은 "가부장적 콤플렉스"의 표현이다. 종교인은 그가 어렸을 때 자신의 눈에 비쳤던 엄격하고 정의롭고 전능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늘에 투영시킨다.(종교에 대한 반감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옮겨 놓은 것이다.)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de 1830 à 1842)』에서 꽁트(Comte, 1798-1857)는 인류정신의 3단계 발전 법칙을 신학적 또는 허구적 단계, 형이상학적 또는 추상적 단계, 과학적 실증적 단계로 구분한다. 꽁트는 유물론이 "상부의 것"을 "하부의 것"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라 한다. 프로이트 학파도 유물론에 속한다고 할 때, 가치를 콤플렉스에 의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설명은 [병리적 현상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은 가치의 본질을, 예술작품과 평범한 작품사이의 구별을, 천재성과 평범성의 차이를, 종교적 주장의 근거가 이성인지 아닌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결국 정신분석학은 가치 즉 인간 욕망의 성향 [인간에서 최고 가치 추구의 성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달비에(Dalbiez)는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하여 설명을 하지만, 인간 속에 비인간적인 것이 있다는 것만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이런 부정적 견해에는 본능이 인간적이 아니다는 것을 가치판단으로 전제하고 있다. 지성이 초월적 성향과 동물적 성향의 중간에 위치하며, 본능을 동물적 성향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능은 단순히 동물적 성향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의 발전적 성향의 하나이다. 지성은 대상에 대해 추상하는 능력의 발전이라 한다면, 본능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지각하는 능력의 발전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참조 *** [이 아래 글은 실존(existence 현존) (ms 04/01/01)의 부록(반실존주의와 현대 구조주의)을 옮겨 놓았다.] ***

*부록: 반실존주의: 현대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식의 역할, 역사의 중요성, 인간의 초월성)를 거부하면서 나온 것으로 철학 학파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도메나흐(Domenach)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정신분석가 라깡, 마르크스 철학자 알튀세르, 인식론의 철학자 푸꼬를 말하면서, 이들의 다양한 시도는 문제도 다르며, 문제 취급하는 방향도 다르다고 한다.

1)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구조주의는 과학적 논리학의 정신과 언어학의 정신에 따라서 철학적 문제를 다룬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논리철학논고(1921)』에서 논리는 "세계의 건축술"이라 말한다. 논리는 명제들의 체험적 의미를 괄호에 넣고, 명제들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2) 구조주의와 언어학

언어학과 관련하여, 구조라는 말은 소쉬르(Saussure 1857-1913)의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에서부터 이나 1928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언어학회>이후이다. 소쉬르는 형식 체계인 랑그와 개인의 실제적인 언어인 파롤을 구분한다. 언어는 서로 관련되어 있는 기호들의 체계이며, 기호들은 기표(signifiant, 표현)과 기의(signifié, 내용)로 이루어져있다. 단어들에는 음소들(phonèmes)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미분적 정의(definition différentielle)가 있다. (단어 대위는 중위와 소위와 대립에서 의미를 갖는다. 음소t와 음소b의 구별은 tête(머리), bête(짐승), fête(축제)를 구별한다.)

3) 언어학적 모델의 풍요성

언어학을 모델로 사회형태, 문학작품, 요리법 등을 효과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구조주의 인간은 "명확하게 표현되는 경우도 있고 또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자기 빠롤이나 문장의 총체"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떤 사회를 그 사회의 신화 즉 그 사회의 빠롤을 통하여 정의한다. 그리고 사회는 하나의 교환체계이며, 교환되는 것들의 성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체계의 형식구조를 탐구할 수 있다. 따라서 구조의 연구는 의미론(sémantique)보다 통사론(syntaxe)에 있다.

4) 구조주의의 세가지 방향

구조주의에는 실존주의의 방향과 반대되는 세가지 근본방향이 있다.

a) 푸꼬의 "체계에 대한 정열"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체계즉 구조는 공시적 관점에 속한다. 역사는 어떤 체계의 변질이며, 시대에 따른 문명들은 불연속이다. 그래서 각 시대는 그 시대 특유의 정신구조의 표시가 새겨져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천을 도입하려면 역사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며 푸꼬는 바로 이것을 거부한다."고 평가한다.

b)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실재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조주의 방법은 문화와 제도가 던져주는 애매한(비밀스런) 메시지를 해독하고자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말할 수 있다. 라깡은 소쉬르와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신경증의 증상을 억압되어 있는 기호내용(기의, signifié)을 찾아내야하는 수수께끼같은 기호표현(기표, signifiant)이라 보았다. 즉 신경증 증상은 "언어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꿈의 전위현상(deplacément, 꿈에서 억압대상의 많은 부분은 한 부분으로 숨겨져서 의미를 갖게되고 이 부분만이 꿈의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은 환유(métonymie)와 동일하다. 그런데 의식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문법도 통사법도 모르는 주체의 담론이다"

c) 무의식의 역할을 이런 식으로 인정하면 새로운 철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반인간 주의(anti-humanisme)가 될 것이다. 인간주체의 행위인 빠롤은 이차적이고, 중요한 것은 랑그 즉 모든 빠롤을 기초하는(초월하는) 비인칭적 체계가 된다. 라깡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와 같이, 나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런 경우에 인간은 언어의 장(le lieu du langage)일 뿐이고 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미 어떤 위상(신의 영역) 속에서 우러나오는 비밀을 표현하는 여러 도구 중에 한 도구인지 모른다. 생명은 우리의 기술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장(위상)이다. 인간은 '제국속의 제국'의 자유 또는 이성을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할 것이다. -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본질주의에 종언을 고했다. 푸꼬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개인적 인격의 허구를 말하고자 한 것인가? - 사회 개혁 또는 혁명에는 꿈의 소원성취와 같은 무의식의 자기성취(메시아)를 요청한다.]

5)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대립은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과 알뛰세르의 마르크시즘이 대립하는 모순개념들 속에 잘 나타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세계에 자기를 투영하고 세계를 변혁시키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르크시즘은 반인간주의(anti-humanisme)이며, 마르크시즘의 인간은 구조의 산물이다. 계급투쟁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의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 등으로 이루어진 체계의 반영이다. 따라서 참된주체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지위와 기능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생산관계이다. 뒤프렌느(Dufrenne)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생산관계를 인간관계라고 생각하지 말자. 체계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것은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들이며, 인간은 명제 함수의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참조 1)

구조주의자들은 실존주의의 여러 가지 관념들을 거부한다. 즉 구조주의는 합리론을 거부하는 실존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는 모든 원인(cause)과 본질(essence)을 초월한다는 실존주의의 선언에 반대한다. 구조주의는 합리론으로의 회귀이며, 논리적 구조로의 회귀이다. 인간은 모든 논리와 투쟁할 수 있는 초월적인 지배자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의 단순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질(자기자신도 의식하지 않는)은 해독 될 수 있다. 특히 인간 언어구도를 통해서 해독 될 수 있다.

[이런 사유방식은 이미 사라졌다. 구조는 인간의 지성의 산물이다. 인간은 구조에 의해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발현에 의해서 의미체로서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 의미 실현체에서 그 내용은 언어의 구도로서 해독되고 설명(이해)되기보다, 의미 연관의 관계방식과 위상에 의하여 설명(이해)되고 실행된다. 실행이 없는 경우에는 내용은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개념 없는 개념의 상태' 즉 '구조없는 실재성(desconstruction)'으로 있다. 이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혼융의 내용(속성 실체)를 형상논자처럼 형상에 내용이 등질적으로 보거나 내용 없는 혼돈의 상태로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이 내용이 너무나 활발하여 규정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름 지울 수 없다(개념 없이)고 말할 수는 있으나, 없는 것(無(무))도 아니고, 하찮은 것으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버린다는 생각이 얼마나 실체의 본성을 왜곡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서도 질료의 자기운동에서 출발하는 사유가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 자기움직임의 한 모습이 형상이 된다.


참조 2)

'1966년은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운동이 승리한 해이다'라고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ément)은 말했다. 이 승리는 실존주의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그 해는 라깡의 『글쓰기(Ecrit)』, 푸꼬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바르트의『비평과 진실(Critique et Verite)』, 토도로프의 『문학의 이론(Theorie de la Litterature)』, 마슈레이의『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Pour une theorie de la production littraire)』등이 출간되었고, 어려운 라깡의 책과 푸꼬의 책이 폭발적 성공을 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해이다. 그래서 르노 마티뇽(Renaud Matignon)은 이들 젊은 작자들을 "1966년의 아이들"이라 칭하고, 프랑스와 도스(Francois Dosse)는 그의 저작 『구조주의의 역사(Histoire du Structuralisme)에서 1966년을 '계몽의 해(l'annee lumiere)'라 부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흐름을 건너가는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구조주의를 신계몽의 시대라고 할까? 그러나 구조주의는 이미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프랑스에서 진정한 구조주의자는 언어학자 방브니스트(Benveniste), 신화학자 뒤메질(Dumezil) 민속학자 레비 스트로스 자신이라고 한다. 이들 전기 구조주의자들은 설핏보아, 사유체계의 틀과 관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신화, 민담, 민속, 원시적 생활, 평범한 대화 등에도 어떤 틀이 있다 것을 보았고, 그 구조들 사이에서 약간의 차별성을 갖는다하더라도 의미를 연관 지우는 근본적 하부 토대에는 보편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골격(구조)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생각이 현존(또는 실존)을 근원적 토대 없이도 존재로서 정립하려는 실존주의자의 실존적 한계 상황의 숨막히는 폐쇄회로를 넘어서는 활로를 개척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주의는 또한 그 태생에서 인간 현존(실존)의 참을 수 없는 모호성(부조리)에 대한 인간 우월성을 다시 확립하려는 인간 중심주의적 인식태도를 내재하고 있었다. 전기 구조주의의 일반성은 인간의 소박한 관념적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구조주의자들은 이 틀(구조) 또는 인간이 생산하는 틀의 일반성을 탐구한다. 1966년의 세대(차기 구조주의자들)들이 탐구한 구조라는 것은 시대적 (인식적) 합의 정도의 것이지 인간의 보편적 능력의 확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되돌이켜 보면, 결국 실존자로서 인간이란 것도, 데카르트의 에고(Ego)가 개별적 자아가 아니듯이, 개별적 인격의 특수 상황에서 자아가 아니라 그 사회와 제도가 은연중에 만들어낸 일반적 자아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실존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차기구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또 한번 소박한 관념론의 틀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면서, 자신들이 구조주의자의 일원으로 또는 그 범주 속에 분류하는 것을 꺼리면서 구조 없는 구조주의 시대(즉 후기 구조주의 시대)에로 이행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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