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5일 토요일

<미술로 보는 20세기>중 '사르트르와 자코메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또는 인간의 의식은 '무(無)'이다. '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존재 방식의 특수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의식은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대상으로 파악되는 순간, 의식이 아니다. 경험과 판단의 주체이지 객체가 아닌 까닭이다. 반면에 사르트르에게 '존재'라는 말은 의식 주체로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대상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다시 전자를 대자(對自), 후자를 즉자(卽自)라고 불렀다. 인간은 사과나 개, 건물 등의 사물처럼 경험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사과나 개, 건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존재, 그것 자체로서 충족된 존재다.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늘 결핍돼 있다는 뜻이다. 의식은 늘 무언가를 바란다. 인간은 이렇듯 결핍돼 있으면서 충족된 존재를 경험하고 지향한다. 나아가 신이 되기를 꿈꾼다. 신은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대자와 즉자로 구별될 때 어느 한쪽만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완전자(신)는 의식이며서 동시에 대상이어야 한다. 인간은 그 지점을 꿈꾼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비록 의식이 무언가를 늘 지향하지만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곧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먹고 싶은 저 사과는 맛있는 사과일지언정 그 자체가 동시에 나의 의식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은 다시 '무'가 된다.
이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위치를 자코메티는 <장 주네의 초상>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장 주네는 사르트르 못지 않게 자코메티와 가까웠던 실존주의 문인이다.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코메티는 모델의 눈동자 부근을 흐리게 처리해 마치 안구가 사라진 듯 묘사하는 한편 대머리를 강조해 해골의 인상을 강하게 살렸다. 앞서 소녀를 그리다가 그의 응시에서 실존을 발견했던 자코메티의 경험을 상기한다면, 모델을 포함해 모든 것을 동일한 색상으로 삭막하게 처리하고 인물의 눈동자만을 비운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응시'는 이 작품 전체의 주제다. 부러 육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일 수 없는 '시선=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표현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지금 관자(觀者)를 '실제로' 쳐다보는 살아있는 시선을 그리려 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 자체는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고 의식은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이 '육체의 사물성'을 고도로 강조해 역으로 '산의식'을 드러내 보이려 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듯 의식을 주제로 했음에도 의식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식만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인 인간에게는 '너는 사실상 존재의 근거가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자코메티가 자기 동생을 모델로 제작한 <디에고>역시 '무'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것들과 달리 가슴 부분의 양괴감이 무척 강해 '존제'의 느낌 또한 적지 않다. '무'와 '존재'가 중첩돼 있는 것이다. 가슴 부분의 물량감은 가늘고 긴 입상들의 두터운 받침대에서 연장돼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상의 두툼한 받침대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받쳐주는 기능과 함께 즉자 곧 사물을 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대지 혹은 세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연상 외에 한 가지 연상을 더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존재다.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은 '무'이면서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물 즉 즉자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대자이다. 대자가 다른 대자를 즉자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어떤 의식이든 스스로가 사물로 취급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따라서 서로를 사물로 취급하는 인간은 상호 적대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식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의 순환은 끝이 없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 대한 초기 사르트르의 비관저 설명이기도 하다.
가느다란 실루엣의 인간은 관자인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지만, 이렇듯 가슴이 두터운 인간이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는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지금 즉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모델과 우리 사이엑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 모델도 우리를 하나의 사물로 볼 것이다. <디에고>는 종국적으로 이런 존재와 무의 긴장 속에 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 아무 근거도 없는, 하나의 우연에 불과한 인간들이 서로를 사물로 보면서 영원한 갈등을 일으킨다. <디에고>는 한마디로 영원한 고독과 부조리로서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 누가 나을 것이 없는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이주헌,<미술로 보는 20세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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