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자존심은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자존심, 예컨대 '내가 이런 지위인데,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슴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그래서 어디서 낮게 평가를 받든, 이른바 자존심이 상하지 않거든요.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그 둘을 분류해서, 재료 상태로서의 삶, 그냥 태어나서 사는 삶을 '비오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이올로지'라고 할 때 그 '비오' 있잖아요. 그 비오스로서의 삶, 그것만으로는 실존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료 상태이기 때문에, 형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형태과학'은 말하자면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구성하는 거죠.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재료 상태의 삶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것, 그래서 자기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 사람들이 사는 원리였고, 이것을 우리가 실존미학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실존미학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겠죠. 자기를 존중하면 자기 삶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기 삶을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것을 삶에서 최고 목표로 삼게 되죠. 그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 삶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고요.
철학자 미셸 푸코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 <자기의 테크놀로지>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온 내용들에 제가 크게 공감했습니다. 이분이 좀 오래 살았으면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 텐데, 바로 뒤에 에이즈로 죽었죠. 그래서 문제의식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근데 철학에서는 인간을 '주체'라고 하지요. 주체라는 것은 세계에 대해 그 위에 있는 것이고, 나, 곧 주체는 1인칭이고 세계는 3인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인칭은 3인칭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인식하고 변형하지요. 나아가 자연을 '자원의 보고'라고 하면서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렸는데,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간관계 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든요. 또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생각한 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멋있는 말로 하면,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주체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체로 만드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학생을 배려한다기보다, 어떤 개별자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코드에 강제로 뜯어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의무적으로 일기를 쓰지요? 제가 제 조카가 옛날에 쓴 일기장을 봤는데,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햇빛은 쨍쨍, 오늘 맑음, 오늘은 누구랑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오늘의 반성할 점을 꼭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의 반성할 점, "오늘 일기를 내일 썼다". (청중 웃음)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를 감시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편적 코드에서 벗어나는 일을 했으면 고해성사를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잘 이뤄지게 됐을 때 흔히 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철들면 예전에 밖에서 감시하던 것을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감시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사회 코드에 맞게, 자기 사회 필요에 맞게 인간들을 뜯어 맞춰요. 그래서 벗어나면 처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율적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 한때는 타율이던 것이 내재화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여러분들 아마 어렸을 때는 이닦기 굉장히 싫어하셨죠? 그래서 날마다 혼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이를 닦지 않고 자면 어떠십니까? 찝찝하잖아요.(웃음) 원래 동물들은 이빨 닦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게 내면화되면 오히려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른바 '이제 철들었다', 타율이 아니라 '알아서 하게 됐다', '자율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셸 푸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자율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자율인가 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율이란 게 사실은 내면화된 타율에 지나지 않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내 안에 들어와 체화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잖아요. 군대 갔다 와서 사람된 그 사람, 이건이 근데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이고 그들의 이상입니다. '세계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근데 철학의 이상에 대해 미셸 푸코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현실을 폭로한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있는 의견, 내가 갖고 있는 견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것들도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떠드는 겁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걸 내가 그냥 계속해서 떠드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말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가 안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면에서 미디어의 확장입니다.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해버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자기가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푸코가 볼 때는 어떤 면어서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이고, 의식이라는 것은 담론의 효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푸코는 주체를 객관화, 객체화시켜버립니다. 알고보면 인간이라는 것, 주체라는 것이 거대한 거미줄 망에 걸린 한 마리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허탈해지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우린 뭘 하라는 말이냐. 여기서 미셸 푸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가,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규범적인 문제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덯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셸 푸코가 바로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에서 끄집어내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갖고 있던 존재 미학을 끄집어냈고, 그래서 푸코의 후기 사상은 인간이 자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 내가 나 자신을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를 탐구합니다. 이때 이 사람이 쓰는 '자기'라는 말이 '주체'를 대신한 말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근대 철학에 오염됐다고 생가했기 때문에 불어 '스와(soi)'를 '자기', '자아'라는 개념으로 썼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드는 그 주체 형성의 방식을 봤더니, 예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앞서 예로 든 일기는 고해성사 형식입니다. 내가 한 일을 쭉 쓰고 나서 바깥의 사회규범과 비교해서 거기서 빗나간 것을 스스로 고해하게 하는 거죠. 그리스 사람들도 일기를 썼는데, 작가들이 쓰는 일종의 착작노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성이 있다기보다, 오늘은 뭘 했는데 책을 좀 덜 읽은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책을 좀 더 많이 읽어야지 하는 식이었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개별자를 옹호하고 존중해주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이라는 게 보편적 도덕이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편에서 시작해서 개별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을 살려주면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식의 도덕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푸코는 그것을 다시 되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을 되살리는 데 있어, 존재에 관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적인 측면입니다. 인간 주위를 둘러보면 다 권력이거든요. 권력이라는 게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다 권력입니다. 집안에도 있고, 학교에 가면 학생과 교수 관계고 권력이고, 회사 가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도 있지요.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행동이 문제가 되면,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굉장히 많은 권력의 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면 굉장히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그야말로 존재를 위해서 자기의 진짜 존재, 곧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정말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는 사람들, 자기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살리려는 사람들은 때로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형태죠. 예컨대 보헤미안 같은 경우는, '보헤미안의 십계명'이라는 게 있어요. 부모를 짚신처럼 알아라, 친구 배신하기를 밥 먹듯 하라 등등.(웃음) 그건 뭐냐 하면 주위에서 자기한테 들어오는 힘들이 워낙 상투화되고 관습화된 권력들이니까 그것들을 다 배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조적 개새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는 기지가 팔요한 것 같아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덜 강압적이거든요. 그러면서 어떤 면에서는 규정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들한테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면,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야, 그게 뭐냐, 쪽팔리게"라고 하면, 사람이 나쁜 일은 해도 쪽팔리는 일은 못하는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더 강하게 체면이 구겨진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 강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 그리스에서는 욕망이 바로 에로스거든요. 자기한테 결여된 것을 바라는 것이 에로스예요.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욕망하지요. 이것은 타동사적으로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욕망은 자동사로서의 욕망, 곧 무엇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욕구 같은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지요. 자기 잠재성을 충분히 펴는 상태가 되고 싶어하는 거지요.
그리스 사람들이 덕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레테는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행복한 것이고, 그런 상태가 바로 아레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예컨데 권력관계라든지 또는 잘살기 위해서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아니면 남들보다 더 높은 지우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살 때, 그리스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덕의 상태가 아니며 매우 불행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프로그래머인데 제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컴퓨터로 한글 문서 작업하고 인터넷 검색만 하는 것은 컴퓨터가 발휘할 수 있는 전체 기능 중에 약 0.0001퍼센트만 활용하는 거라고 합니다.(웃음) 그러니까 컴퓨터 활용의 아레테 상태가 아닌 거예요. 바깥에 있는 무엇에 대한 욕망, 곧 타동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자동사의 욕망이 희생하는 것은 아레테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무엇과 타협해서 어디에 들어가면 뭐가 되고, 뭐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겠죠. 사람들이 저에게 굽실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거든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책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은 특권층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특권층이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까지 되니까요. 그렇게 살면서 저는 제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동사의 욕망이 아니라 자동사의 욕망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동사의 욕망일 때는 바깥에서 회유나 위협, 예컨대 "너 밥줄 끊어버릴 거야", 아니면 "이거 해줄게"라고 하면서 사람을 망가뜨리잖아요. 그런데 아예 그걸 포기하고 살면, 협박받을 것도 없지요. "밥줄 끊을 거야" 그러면 "끊어봐", 또 "이거 해줄게"그러면 "너나 과자 많이 사 먹어"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뭐랑 똑같으냐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상황을 한번 보세요.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당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물으면서 쳐다보니까, 디오게네스가 "비켜줘. 햇볕 좀 쬐게"라고 했거든요.
알렉산드라는 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걸 가졌지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디오게네스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욕망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알렉산드라가 갖고 있는 게 먹히질 않아요. 남이 부러워해야 자기가 자랑스러워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부러워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알렉산드라는 "내가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로 태오나고 싶다. 그래도 끝까지 대왕이 되고 싶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개였잖아요. '시미시즘'이라는 말이 원래 개예요. 개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의미죠. 디오게네스가 "나는 개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대왕은 개가 되고 싶었는데, 개는 대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욕망 자체가 다른 거죠. 대왕이 갖고 있는 정복욕이나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떤 한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됐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자동사로서의 욕망이라는 거죠...
- 진중권, 도서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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