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



환상극 : 브레히트 연극이 우리에게 낯설게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종래의 소위 '환상극'이라고 불리는 전통극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연극의 기본 법칙은 우리가 무대 위에서 보고 있는 것은 실생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방 안쪽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방의 4면 벽은 이상하게도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환영(幻影)은 파괴하는 그 어떤 장치도 허용되지 않는다. 무대장치, 조명, 분장, 그리고 연기 등 연극적 요소들은 이러한 환영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환상극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가끔 그 환상극이야말로 진정한 연극의 유일한 방편이라고 결론지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환상극은 연극 사조이ㅔ서 극히 단순한 역할을 해낼 뿐이다. 예컨대 무운시(無韻詩)와 독백과 단순화된 무대 양식을 지닌 셰익스피어 연극은 환상극과는 별 관계가 없다.

반(反)-환상극 : 현대의 많은 극작가들은 환상극의 한계를 인식하여 거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 연극의 경우, 유진 오닐의 「이상한 간주곡」(Strange Interlude), 쏜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Our Town), 테네시 윌리암즈의 「유리 동물원」(The Glass Menagerie), 그리고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등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 환상적 규범을 파기시키고 있다. 환상주의에 대한 서구의 반대론자들은 루이지 피란델로, 독일에서 브레히트와 함께 일한 어윈 피스카토르, 그리고 부조리 작가 베켓트, 이오네스코, 그리고 프랑스의 쟝 쥬네를 꼽을 수 있다.

구조 : 브레히트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전통극의 양식은 인위적이고 불필요한 제한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종전의 극은 하나의 단순한 행동을 취급하고 그것이 지니는 시공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면은 그것이 장면 전체에 기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하나의 대안으로서 브레히트는 '서사적' (敍事的) 구조를 제시한다. 즉 이것은 서사적이고 서술적 형태에 기초를 둔 구조로서, 자연스런 에피소드로 이루어지며, 거기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며 개개의 에피소드는 전체에 기여할 뿐 아니라 에피소드 그 자체로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서사적 구조는 전통극의 형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과거의 시점에서 표현되는 이른바 과거의 사건을 서술적 기반을 빌어 다룬다. 종래의 전통극에서 다루는 가상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사극에서, 브레히트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과거에 발생한 어떤 행위로 규정토록 유도하여 그 행위가 현재에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브레히트는 현재 무대 위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실생활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른바 종래의 환상극의 구조적 패턴들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화 : '서사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브레히트 연극 이론의 유일한 부분이다. 이러한 서사적 구조의 뉘앙스는 무대화 작업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브레히트는 무대의 형태를 변경시킨다거나 객석과 무대와의 물리적 관계 (이를테면, 종래의 원형 극장에서 원형 무대가 객성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든가...) 를 배쳑하였다. 그가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관객과 현재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의 관계였다. 관객은 최면술에 걸리어 연극을 '리얼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최면술에 의해 전통극이 끼친 영향의 일부는 객성이 조명이 꺼진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브레히트는 객석의 조명도 항시 켜진 상태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야만이 관객은 현실을 의식하게 되고 지적으로 깨어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냉철한 이성에 의해 그 것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브레히트의 주장에 의하면 무대 위에서 사용되는 소품들은 관객을 우롱하여 관객이 극장 안에 있다는 것을 잊게하는 데 목적을 두어서는 안된다.
브레히트는 무대상의 인위적 조작을 거부한다. 예컨대, 밤 장면을 설정할 경우, 인공 조명을 사용하여 실제의 밤이라는 환상을 자아내게 해서는 안된다. 밤을 상징하는 인공의 달을 매달기만 하면 된다. 무대는 항시 현란한 조명을 흠뻑 받고 있어야만 관객은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초기에 습장에 몰두하면서, 브레히트는 광원 그 자체는 항시 관객이 볼 수 있는 곳에 비치되어야 한도고 주장했다.
같은 취지의 반-환상극적 의도는 무대 공연의 여러 연극적 요소에 대한 브레히트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브레히트는 종전의 전통극의 양식에 맞추어 실제의 장솔르 재현하기 위해 시도되는 무대장치를 거부했다. 그는 단순화된 무대를 선호했으며, 무대는 어디까지나 실생활에서 따온 것이어야 하며 인위적이고 조작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단순화된 무대와 특정사물 - 이를테면, 「베짱어멈」속의 수레 - 의 리얼리티 사이의 대조 현상은 브레히트 연극의 핵심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로 인해 관객은 가상적 현실을 수동적으로 의식하기보다는 중요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게 도니다. 의상이나 분장과 같은 그러한 디테일에 대한 브레히트의 태도 또한 이러한 기본적 자세와 일치한다.

연기 : 다른 모든 연극에서처럼,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그 핵심을 차지하는 요소는 배우이다. 브레히트의 연극이 이상해 보이는 것은, 배우는 자신이 맡고 있는 역중 인물(성격)이 되지 않도록 하는 브레히트의 의도적 이념 때문이다. 배우의 임무는 성격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인물 성격을 '설명'하는 데 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글에서 연기자를 일개의 구경꾼에 비유해 이러한 개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연기자는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하고 구경꾼 또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구경꾼은 어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 이를테면, 자동차에 치인 보행자 - 이 어떻게 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거나 실제의 '행동이나 연기'를 통해 보여 줄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구경꾼과 보행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구경꾼은 분명 보행자가 한 행위를 보여 준다. 구경꾼은 그 보행자의 걸음을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하거나 보여 준다. 연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연기자는 인물이 특정 장소에 이룩해 낸 행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Peter Lorre가 브레히트의 「인간은 인간이다 」(Mans ist Mann)를 처음으로 공연했을 때, 그는 Galy Gay의 행동을 보여 주었을 뿌 항시 Peter Lorre라는 그 인물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배울르 칭찬하느 ㄴ전통극 - "배우는 단순히 리어왕 역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배우는 리어왕이 되어야 한다" - 은 브레히트의 연극 세계에서는 설 곳이 없다.

소외효과 :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 중 가장 널리 논의되는 요소는 '소외'의 개념이다. 이 '소외'의 개념은 브레히트의 이론에서뿐 아니라 여타의 다른 이론의 요소들에도 내재하고 있다. 독일 원어로는 'verfremdung'이며 '낯설게 하기'의 뜻이다. 이 말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관객이 새로운 고나점에서 사물을 관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관객이 이제까지 익숙해져 온 것에서 '낯설게' 만들거나 '소외'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소외의 개념은 결코 브레히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낭만 시인 Shelley는 시인의 임무를 규명하는 말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 사물, 그리고 상황을 마치 처음 보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했다." 브레히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재혼할 때 어머니로부터 '소원'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머니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른 남자의 아내로 보게 되며, 전에는 어머니를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소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롭다는 것은 연극 예술의 초보적 원리에 한정된 것이지 그것이 보다 나은 연극을 위한 가치 체계를 수립하는 근본 원리는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완전히 익숙해지게 되었을 때, 그것이 항상 그렇게 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절로 빠져 들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것의 필연성을 수용한다. 그러나 새로운 무언가가 우리에게 제시될 때, 우리는 새로운 그 무엇이 반드시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무언가로부터 '소원'될 때, 그것은 마치 무언가가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므로 우리는 그토록 새롭고 낯선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브레히트의 경우, 이것은 연극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체계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을 '멀리하는' 예술가는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대안들이 있으며, 자본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것을 관찰하는 자들에게 인식시켜 준다. 브레히트의 생각에, 사회 개혁은 자신의 소위 '소외 효과'에 으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 노선에 따라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브레히트의 이론은 극히 한정적이어서 비공산권 독자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소외 효과와 다른 개념과의 상관 관계 : 지금까지 논의된 바, 브레히트의 고유한 극 구조, 무대화, 그리고 연기 그 모두가 다 소외의 개념과 관련을 맺고 있다. '소외효과'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구조, 무대화, 그리고 연기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브레히트 고유의 극 구조, 무대화, 그리고 연기술이 지금까지 유지된 것은 바로 그의 독특한 '소외효과' 때문일 것이다.

연극 목적 : 그의 초기 연극 작품에서, 브레히트는 연극의 목적은 "교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극을 통해서 관객은 보다 나은 세계의 건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후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연극의 목적은 모든 예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쾌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플라톤의 이론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시대에 어울리는 '쾌락' 이란 우리가 먹는 과자에서 맛보는 그러한 종류의 쾌락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생겨나는 보다 심오한 쾌락이다. '쾌락'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브레히트는 초기의 '교훈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오히려 그는 교유과 쾌락의 두 가지 요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관객 : 종래의 환상극은 주로 감정 이입에 근거를 둔 이른바 반이성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관객으로부터 요구한다. 연기자는 역중 인물을 대신하여 무대에 서게 되며 따라서 연기자는 역중 인물이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는 자이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정서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보다 비판적이고 지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관객은 감정 이입에 빠져들지 말고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 판단을 해야 한다.

게스투스(GESTUS) : 브레히트 연극 이론의 핵심어는 '게스투스'다. 불행하게도, 이 용어에 대치될 만한 영어 용어는 없다. (역자주 : Gestus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행동'이라 번역할 수 있다. 사회적 행동은 직업 혹은 계층에 따라서 고정화되어 있고 특정화되어 있는 행동의 패턴이라 할 수 있다. ) 브레히트가 적어도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사회적 관계를 외부적으로 표현할 경우다. 그러므로 '게스투스'는 하나의 행위와 말과 시각에 의해 어떤 관계를 들추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와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 : 이러한 용어들을 이해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다. 브레히트는 종전의 환상극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연극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며, 반-환상극을 상대적으로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 명명한 것이다.

- 윌리엄 캔니 著, 허은 옮김<가까이서 본 브레히트의 걸작들>중에서, 1996
[출처]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작성자 소낙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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