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장 뒤뷔페 '우를루프의 정원'

"제가 봤을 때

그림의 쓰임새를 흔히들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각자의 집에다 둘 수 있고,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고,

영원히 볼 수 있는 그림이 되는 거죠.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혹은 타오르는 불을 보듯이요.



나는 내가 전문가가 아닌 애호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그러길 바래요.

내가 원하는 건 단지, 하고싶을 때 아무런 구속없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고기를 낚는 낚시꾼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오직 그림에서 찾은 즐거움 때문이죠.

내 그림은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제야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단 생각이 듭니다.

전혀 새로운 빛 속에서 이들을 보는 것 같고,

안 보이던 게 보이는 것 같지요.

신기한 마술 안경이라도 쓴 것같은 기분입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두 눈은 아무것도 못 보죠.

그림이 내 눈이 되는 겁니다.

시골길에서 돌멩이 하나를 봐도,

뭘 본건지도 모르겠고, 뭘 아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아 그게 돌멩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집에와서 그림을 그리려고 한 때입니다.



그리고... (집과 나무와 밭이 있는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보며)

저런 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뭐가 예쁜 건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제게 있어선

거슬려 보입니다. 그럴 이유는 없지만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싫어하는 것도 화폭에 담지요.

그러면서 내 안의 감정을 비워내는 겁니다.



미의 개념이란 없다고 봅니다.

아름답다는 건 착각이죠.

미추의 개념 모두가 없어요.

시대에 맞게 사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이죠.

미란 사회적 통념일 뿐입니다.

한가지 유효한 개념이 있다면 그건 매혹, 즉 홀리는 것이죠.

장담컨대,

그 어떤 사물이든

그 어떤 존재든

그 어떤 장소든

강한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거지요.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빠져들게 하는 겁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그게 아름답다고 하는 거죠.

하지만 뭐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제 생각엔

예기치 못한 데서 미를 찾는게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은 눈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영혼에 대고 말하는 겁니다!"







- 장 뒤뷔페, 인터뷰 中









장 뒤뷔페의 전시가 끝나기 이틀전 부랴부랴 전시를 봤다.

저녁 6시가 넘어서도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장 뒤뷔페, 참으로 재능이 다양해서 초년기에는 어느길로 가야할지 이리저리 헤메이다가

중년기가 되어서야 자신의 길을 찾고 죽을 때까지 미술가가 된 사내.

아카데믹한 화풍은 배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그리겠다며 미술대학을 뛰쳐나왔지만,

그후로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42살까지 포도주 상인이 된 사내.

이 사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42살, 미술가가 되길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 그동안 못그려 본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동안 얼마나 멋진 생각을 화폭에 담아보지 못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장 뒤뷔페의 그림들은 찡하고 통하는 면이 있다. 그걸 화가의 진실성이라고 했던가, 진실이 담겨 있는 그의 그림들은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그 어떤 현대 회화보다 가슴으로 먼저 다가선다. 정말 장 뒤뷔페의 그림들은 영혼에 대고 말하는 듯 하다.

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中

< 그의 욕은 압축적이고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에 가까웠고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내가 인간의 어떤 신체 기관과 닮았는지, 어떻게 그 기관을 볼 것인지, 장차 죽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해 상기시켜주었다)

가락과 후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노래가 될만하고 (내가 어떤 짐승으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았는데 그 짐승도 대여섯 가지로 다양함을 보여주었다)

한마디 대꾸할 틈도 없이 퍼붓는다는 점에서 소나기처럼 시원했다 >


- 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가수의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단순히 놀자판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는 사람, 달을 가리키는 여사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해요"



- 이상은, 책<21세기를 바꾸는 교양> 中 -

개전

예술의 전당의 '개전'을 다녀오다. 개들이 왕왕 울부짖는 '개판'다운 전시회. '개'를 이해해보고, '개와 인간'을 뒤집어보고, '개'의 입장에서 이야기해고, '개'를 다시 만들어보았던 전시회. 한가지 소재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작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음.


'개전' 앞줄에 적혀있는 글들


<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이고,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자세와 노력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새로운 자기(나)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혁명이 되어야 한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사명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미지 생산'과 '의미생산'을 통해 사회에 대한 말걸기이다>


<세상앞에 우뚝서는 연습을 하려면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난을 자청함으로써 가능하다>

김종학 프로덕션 기획프로듀서 채용공고

<김종학 프로덕션 기획프로듀서 채용공고> 2006/09/05 일자의 글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글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적어놓음.



기획 프로듀서_요구되는 능력



1) 드라마 아이템이 될 만한 오리지널 스토리나 원작을 착안/발견할 수 있는 능력과 드라마에 대한 애정.



2) 발견한 아이템의 컨셉을 잡아 문서/구두로 작가/감독/배우/상사를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3) 이 과정에서 생기는 난관과 저항, 반대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뚝심과 자신감. 끈기. 그리고 체력.



4)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학 자신의 아이템이 채택되지 않았을 때 상사와 조직에 순응하는 팀 마인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자신의 아이템을 숙성시켜 결국은 설득에 성공하는 용의주도함.



5) 협찬/PPL기획력, 영업마인드.

김민수 "모던디자인비평"

누군가 이 책 전체를 통해 필자가 밝히고자 했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해보라고 주문한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그것은 디자인의 '반성적 성찰의 인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필자가 이 책을 통해 논의했던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포스트 모던과 해체로의 이탈 과정은 철학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또는 그것이 규정했던 규범 체계들에 대한 반성을 통한 '극복'(하버마스식의)과 '초월'(데리다와 푸코식의)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러한 이탈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필자는 그동안 적용되었던 디자인 실무와 교육에 대한 냉철한 반성적 성찰만이 앞으로의 방향 설정에 진정으로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디자인의 실무와 교육을 통해 적용되었던 상당히 많은 주된 가치들이 이미 많은 변화를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의 양상은 디자인의 개념 자체에 대한 수정으로까지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앞서 우리가 살펴 보았들이 결코 우연에 의해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뚜렷한 역사적, 정치 - 경제적, 사회 - 문화적 인과 관계들 속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디자인은 그와 같은 현재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설득력있는 해석이나 그 자체를 평가하기 위한 어떠한 수단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이 책에서 필자가 모더니즘 이후의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디자인을 그 철학적 견해에서부터 디자인 실행까지 연결시키면서 조명한 데 대해 그와 같은 외래적 현상들이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혹자들은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원래 '디자인'이란 개념 자체도 외래적으로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한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은 왜 디자인의 개념 자체를 수입된 시점에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서구 사회에서조차 그 개념을 포기 또는 수정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애써 도외시하고 있는가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역사 의식의 취약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이는 달리 말해 스스로를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결별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오늘날의 디자인의 개념적 변화가 서구적 상황에서 발생된 현상이라 간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정치 - 경제적, 사회 - 문화적 변화 속에서 볼 때 결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또한 우리가 과거의 통제된 유형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정보와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든 현상은 결코 어떤 특수한 문화 지형 내에서 고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시공간 상의 변화도 부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태평양 전쟁 당시 어떤 섬에서 땅굴을 파고 옥쇄(玉碎)하다 살아 남아 몇 십년 뒤 땅 밖으로 기어나온 일본군이 자신은 아직도 '황국(皇國)을 지키는 전사'라고 울부짖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세계 문화적 보편성을 위해 우리 고유의 특수성을 희생시켜온 우리에게 현재 직면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석의 방향이 어느 한쪽을 배격하면서 다른 한쪽만을 강조해야 하는 모습으로 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은 세계적 보편성과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그 참다운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난 40년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 놓은 국제적 '보편성'을 얻기 위해 총력을 다해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문화적 '특수성'들이 '보편성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유실되고 망각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 우리 고유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문화 저변에서부터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흥행이 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접해졌듯이). 어찌 보면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조장되기 시작한 것은 보편성이 어느 정도 획득되기 시작한 아주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디자인의 임무는 현재 이중적인 과제로 남는다. 즉 우리는 한편으로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보편적인 디자인 어휘를 전개시켜야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서 어떠한 디자인을 어떻게 현대 디자인의 맥락으로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요즘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한 표어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성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요즘 모 기업에서 개발된 "누룽지를 만들 수 있는 전자 밥통"과 "물걸레질하는 진공 소제기"와 같은 제품들이 우리와 다른 문화 공간 속에 곧바로 적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결국 국수주의적인 자기 도취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반대로 외래 문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반대로 자기 멸시와 허무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해석하는 태도에 한가지 문제가 있음을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유달리 한국에서 알레르기 반응식으로 곧잘 매스컴을 통해 떠들어 대는 "문화 침투(cultural invasion)"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文化觀)'이 이 두 단어의 결합 속에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일상적 용례에서 우리가 "~에 침투하다 또는 침투해 들어가다"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원래 '침투'라는 말은 특정한 공간 또는 상황이 전제된 말이다. 침투라는 말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공간 또는 허약한 대상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며, 공간을 특정하게 한정지울 수 없을 만큼 원대하거나 강인한 것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로(특정 공간 속으로) 외계인이 침투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지구인이 우주에 침투하다" 라는 말은 별로 의미있는 말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병원균이 몸에 침투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겨 항균력이 약해졌을 때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침투가 문화라는 말과 결합되어 "문화 침투"란 말이 되었을 때 이 복합어는 어떤 이질적 문화가 침투하게 되는 대성으로서 '고정된, 정체된, 비역동적인, 허약한 문화 공간'을 지시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해 어떤 이질 문화가 침투하고 있다고 호들갑 떨며 경고식의 말을 해대는 것은 우리 문화의 비역동적 정체성을 자인하는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갖고 있던 쪽박마저 깨질까봐 벌벌 떨고 있는 너무나 미약한, 주체적 자존심도 없는 존재들로 매도하게 되는 말이 된다. 그 말은 우리 문화를 정체된 허약함으로 규정지움으로써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결국에는 소인배임을 자처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때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내요시가 "한국과 그 예술"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미(美)를 반도적인 지리적 특성과 그로 인한 비참한 역사로 각인된 것으로 파악해 "애상적인 비애의 미"로 서술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문화 침투란, 스스로를 우주적 공간으로 원대하게 여기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강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에 대해서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용어이다. 또한 그 문화가 주체적 자아를 갖고 있다면 설사 수퍼 헤비급의 이질적인 것이 침투한다고 해도 자체의 문화적 에너지로 용해시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문화 침투라는 용어 속에서 스스로를 소인배로 격하시키게끔 유도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성 말살의 망령이 되살아남을 느끼곤 한다. 대한 민국 헌법 전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가를 "한반도와 부속 영토로"규정짓고 있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를 정체적인 불변의 공간적 의미로 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갖게된 문화 개념은 뜨겁게 살아 숨쉬는 오늘의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무덤에서 파낸 '골동' 문화밖에는 없는 것이다. 왜 문화는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의 손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점에 대해 필자가 지난 1986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 59가의 IBM 갤러리에서 보았던 한 전시회에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도쿄, 형태와 정신(Tokyo, Form&Spirit)"이라는 전시회로 일본 문화 재단과 유수의 일본 기업들의 후원으로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 사진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마련된 것이었다. 그 전시회는 일본의 전통성과 현대의 조형적 실험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전시회였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필자의 뒤통수를 쳤던 것은 8폭짜리 병풍이었다. 그것은 칼을 들고 군무를 추고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수 놓은 것이었는데, 색이 좀 바래 누가 보아도 '에도 시대' 이전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골동품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병풍을 눈여겨 보다가 그림의 하단부에 사무라이가 신고 있던 신발이 '나이키' 운동화임을 발견하고 필자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잠시 후 그것은 그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아아! 이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과거로 오가며 내일로 향해가는 사람들이구나. 두고두고 필자는 그 '나이키를 신은 사무라이'의 망령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일본은 우리가 이땅에서 애써 부인하고 그로 인해 편협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커진 나라이다. 일본의 위상이 훨씬 더 커진 원동력은 바로 그와 같이 과거를 오늘에서 정의하려는 노력과 그로 인해 '골동'을 그 자체로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로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문화적 역동성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옛 선조들이 일보에 전해준 고대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일본에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기 최면에 빠진 '골동' 문화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편협하고 배타적인 속성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우리는 영원히 '수비형'의 문화로 남아 있으라는 주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져왔던 이와 같은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에 일대 방향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는 언제 침투할지 모를 외래 문화에 대해 언제까지 불한한 '수비형'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말이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 대응하고, 우리의 문화를 외부적으로 발산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 문화 내에서 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수비형의 자세를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상당히 철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안에 주체적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주체적 자아라는 자기 - 정제력을 가진 여과체가 있을 때 또한 그러한 주체들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양질의 문화를 식별해 냄으로써 스스로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자생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위로부터 명령에 의해 하달된 것(top - down)이 아니라 자체의 여과 기능을 통해 '아래로부터 형성된 문화(bottom - up culture)'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학술적인 설명 이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설사 어떠한 외래 문화들의 침투가 융단 폭격식으로 가해진다 해도 붕괴되기는 커녕 끊임없는 생성 과정을 통해 계속적으로 자체 문화의 폭을 증식시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감각과 하께 자기 - 여과력의 기능이 우리의 문화 속에 있어 준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추구해온 디자인스럽게 보이는 '모조 디자인(pseudo - design)'의 차원을 벗어나 개념 설정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의 해석을 디자인에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앞서 보았던 베네통사의 고아고, 멤피스의 산업 디자인, 꼼드 갹송의 패션이 넓혀 놓은 '인식의 범위까지만' 디자인해야 하는가? 그러한 창의적인 작업들이 이 땅에 처음 소개될 때면 으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디자인이 아니야!" 라고 애써 거부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온통 그와 같은 것들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창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허물어 버린 창조적 인식의 그늘을 더 좋아하는가 말이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의 디자인 교육 커리큘럼이 그동안 어떠한 재평가도 없이 다시 바우하우스 또는 울름 조형대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서구식 커리큘럼을 '구색 맞추기식'으로 복제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디자인 운동들이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일말의 재고도 없이 받아 들여져 마치 그것들 아니면 교육이 망가지는 것처럼 소중시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의 디자인 교육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념적 오류와 그것으로 인해 각인된 디자인 교육의 방식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앞서 필자가 바우하우의 좌익 성향과 당시 독일의 철학적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듯이, 사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당시의 나찌 독일을 가능하게 했던 기반 속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나찌의 국가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 우익 정치 이념은 좌익 바우하우스를 폐교시키고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킨 계기를 제공했지만, 이념 자체로 보았을 때 나찌의 정치 이념은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른바 나찌가 수백만 유태인 대량 학살의 명분으로 삼았던 게르만 민족의 단일한 '혈통적 순수성' 보존의 이념과 디자인에 있어 어떠한 개별적인 탐색과 표현성도 말살시킨 모던 디자인의 순수한 '기능적 순수함'의 이념 사이에는 은유적인 것 이상의 직접적인 유사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똑같은 동전에 찍혀진 양면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역사적 공간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가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이억만리 떨어진 이 땅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디자인 교육의 유일한 패러다임으로 언제나 찬양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 우리는 현 시대에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는 철학적, 정치 - 경제적, 사회적 - 문화적 구조 위에서 그동안 추구해 왔던 디자인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디자인 자체의 비평적 기능을 파생시킴으로써 철저한 '자기 - 반성'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될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디자인이 어떠한 위상에서 어떤 목표로 향해 가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상과 목표를 설정하려는 어떠한 자체의 논의도 없이 다만 그럴듯 해보이는, 또는 남들이 우려 먹다 버린, 방법론의 도입을 되풀이 함은 마치 키없이 바다 위에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지 않겠는가?


김민수,"모던디자인비평" (안그라픽스, 1994) 중 <맺음말>

자존심은 존재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

...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자존심은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자존심, 예컨대 '내가 이런 지위인데,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슴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그래서 어디서 낮게 평가를 받든, 이른바 자존심이 상하지 않거든요.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그 둘을 분류해서, 재료 상태로서의 삶, 그냥 태어나서 사는 삶을 '비오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이올로지'라고 할 때 그 '비오' 있잖아요. 그 비오스로서의 삶, 그것만으로는 실존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료 상태이기 때문에, 형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형태과학'은 말하자면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구성하는 거죠.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재료 상태의 삶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것, 그래서 자기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 사람들이 사는 원리였고, 이것을 우리가 실존미학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실존미학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겠죠. 자기를 존중하면 자기 삶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기 삶을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것을 삶에서 최고 목표로 삼게 되죠. 그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 삶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고요.

철학자 미셸 푸코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 <자기의 테크놀로지>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온 내용들에 제가 크게 공감했습니다. 이분이 좀 오래 살았으면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 텐데, 바로 뒤에 에이즈로 죽었죠. 그래서 문제의식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근데 철학에서는 인간을 '주체'라고 하지요. 주체라는 것은 세계에 대해 그 위에 있는 것이고, 나, 곧 주체는 1인칭이고 세계는 3인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인칭은 3인칭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인식하고 변형하지요. 나아가 자연을 '자원의 보고'라고 하면서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렸는데,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간관계 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든요. 또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생각한 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멋있는 말로 하면,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주체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체로 만드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학생을 배려한다기보다, 어떤 개별자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코드에 강제로 뜯어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의무적으로 일기를 쓰지요? 제가 제 조카가 옛날에 쓴 일기장을 봤는데,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햇빛은 쨍쨍, 오늘 맑음, 오늘은 누구랑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오늘의 반성할 점을 꼭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의 반성할 점, "오늘 일기를 내일 썼다". (청중 웃음)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를 감시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편적 코드에서 벗어나는 일을 했으면 고해성사를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잘 이뤄지게 됐을 때 흔히 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철들면 예전에 밖에서 감시하던 것을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감시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사회 코드에 맞게, 자기 사회 필요에 맞게 인간들을 뜯어 맞춰요. 그래서 벗어나면 처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율적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 한때는 타율이던 것이 내재화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여러분들 아마 어렸을 때는 이닦기 굉장히 싫어하셨죠? 그래서 날마다 혼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이를 닦지 않고 자면 어떠십니까? 찝찝하잖아요.(웃음) 원래 동물들은 이빨 닦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게 내면화되면 오히려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른바 '이제 철들었다', 타율이 아니라 '알아서 하게 됐다', '자율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셸 푸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자율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자율인가 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율이란 게 사실은 내면화된 타율에 지나지 않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내 안에 들어와 체화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잖아요. 군대 갔다 와서 사람된 그 사람, 이건이 근데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이고 그들의 이상입니다. '세계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근데 철학의 이상에 대해 미셸 푸코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현실을 폭로한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있는 의견, 내가 갖고 있는 견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것들도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떠드는 겁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걸 내가 그냥 계속해서 떠드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말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가 안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면에서 미디어의 확장입니다.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해버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자기가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푸코가 볼 때는 어떤 면어서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이고, 의식이라는 것은 담론의 효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푸코는 주체를 객관화, 객체화시켜버립니다. 알고보면 인간이라는 것, 주체라는 것이 거대한 거미줄 망에 걸린 한 마리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허탈해지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우린 뭘 하라는 말이냐. 여기서 미셸 푸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가,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규범적인 문제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덯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셸 푸코가 바로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에서 끄집어내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갖고 있던 존재 미학을 끄집어냈고, 그래서 푸코의 후기 사상은 인간이 자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 내가 나 자신을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를 탐구합니다. 이때 이 사람이 쓰는 '자기'라는 말이 '주체'를 대신한 말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근대 철학에 오염됐다고 생가했기 때문에 불어 '스와(soi)'를 '자기', '자아'라는 개념으로 썼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드는 그 주체 형성의 방식을 봤더니, 예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앞서 예로 든 일기는 고해성사 형식입니다. 내가 한 일을 쭉 쓰고 나서 바깥의 사회규범과 비교해서 거기서 빗나간 것을 스스로 고해하게 하는 거죠. 그리스 사람들도 일기를 썼는데, 작가들이 쓰는 일종의 착작노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성이 있다기보다, 오늘은 뭘 했는데 책을 좀 덜 읽은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책을 좀 더 많이 읽어야지 하는 식이었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개별자를 옹호하고 존중해주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이라는 게 보편적 도덕이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편에서 시작해서 개별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을 살려주면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식의 도덕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푸코는 그것을 다시 되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을 되살리는 데 있어, 존재에 관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적인 측면입니다. 인간 주위를 둘러보면 다 권력이거든요. 권력이라는 게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다 권력입니다. 집안에도 있고, 학교에 가면 학생과 교수 관계고 권력이고, 회사 가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도 있지요.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행동이 문제가 되면,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굉장히 많은 권력의 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면 굉장히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그야말로 존재를 위해서 자기의 진짜 존재, 곧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정말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는 사람들, 자기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살리려는 사람들은 때로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형태죠. 예컨대 보헤미안 같은 경우는, '보헤미안의 십계명'이라는 게 있어요. 부모를 짚신처럼 알아라, 친구 배신하기를 밥 먹듯 하라 등등.(웃음) 그건 뭐냐 하면 주위에서 자기한테 들어오는 힘들이 워낙 상투화되고 관습화된 권력들이니까 그것들을 다 배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조적 개새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는 기지가 팔요한 것 같아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덜 강압적이거든요. 그러면서 어떤 면에서는 규정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들한테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면,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야, 그게 뭐냐, 쪽팔리게"라고 하면, 사람이 나쁜 일은 해도 쪽팔리는 일은 못하는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더 강하게 체면이 구겨진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 강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 그리스에서는 욕망이 바로 에로스거든요. 자기한테 결여된 것을 바라는 것이 에로스예요.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욕망하지요. 이것은 타동사적으로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욕망은 자동사로서의 욕망, 곧 무엇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욕구 같은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지요. 자기 잠재성을 충분히 펴는 상태가 되고 싶어하는 거지요.

그리스 사람들이 덕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레테는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행복한 것이고, 그런 상태가 바로 아레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예컨데 권력관계라든지 또는 잘살기 위해서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아니면 남들보다 더 높은 지우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살 때, 그리스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덕의 상태가 아니며 매우 불행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프로그래머인데 제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컴퓨터로 한글 문서 작업하고 인터넷 검색만 하는 것은 컴퓨터가 발휘할 수 있는 전체 기능 중에 약 0.0001퍼센트만 활용하는 거라고 합니다.(웃음) 그러니까 컴퓨터 활용의 아레테 상태가 아닌 거예요. 바깥에 있는 무엇에 대한 욕망, 곧 타동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자동사의 욕망이 희생하는 것은 아레테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무엇과 타협해서 어디에 들어가면 뭐가 되고, 뭐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겠죠. 사람들이 저에게 굽실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거든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책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은 특권층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특권층이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까지 되니까요. 그렇게 살면서 저는 제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동사의 욕망이 아니라 자동사의 욕망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동사의 욕망일 때는 바깥에서 회유나 위협, 예컨대 "너 밥줄 끊어버릴 거야", 아니면 "이거 해줄게"라고 하면서 사람을 망가뜨리잖아요. 그런데 아예 그걸 포기하고 살면, 협박받을 것도 없지요. "밥줄 끊을 거야" 그러면 "끊어봐", 또 "이거 해줄게"그러면 "너나 과자 많이 사 먹어"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뭐랑 똑같으냐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상황을 한번 보세요.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당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물으면서 쳐다보니까, 디오게네스가 "비켜줘. 햇볕 좀 쬐게"라고 했거든요.

알렉산드라는 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걸 가졌지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디오게네스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욕망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알렉산드라가 갖고 있는 게 먹히질 않아요. 남이 부러워해야 자기가 자랑스러워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부러워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알렉산드라는 "내가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로 태오나고 싶다. 그래도 끝까지 대왕이 되고 싶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개였잖아요. '시미시즘'이라는 말이 원래 개예요. 개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의미죠. 디오게네스가 "나는 개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대왕은 개가 되고 싶었는데, 개는 대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욕망 자체가 다른 거죠. 대왕이 갖고 있는 정복욕이나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떤 한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됐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자동사로서의 욕망이라는 거죠...



- 진중권, 도서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중 -

Misty moon - 임형주

Misty moon



Misty moon in the still of night

Quietly shed your pale blue light

Promise me not a word to speak

Of the sins in my heart I keep



Silent moon, ever knowing moon

Pray thee tell, will the Time be soon

Just to bring flowers for her hair

Give my Life, only to be fair



Somewhere deep inside my reverie

Hear a voice that calls out to me

Like a long forgotten lullaby

Is this a dream...within a dream



Misty moon bathe me in your glow

Hide the tears, shamelessly they flow

Take me home where my Spirit yearns

Where she lies, wait for my return






안개 속의 달



한밤의 희미한 달

조용히 옅은 푸른 빛을 뿌리는군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내 안의 죄들을

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침묵하는 달.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있는 달

그대에게 곧 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녀의 머리에 꽂기위한 꽃가지를 가지고 가서

내 인생을 드립니다.



내 안의 환상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를 불러내는 소리가 들리네요.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있던 자장가처럼

이것이 꿈 속에서 꾸는 꿈일까요?



안개 속의 달은 당신의 불빛으로 나를 가득 채웁니다.

내 눈물을 숨기고 불빛들을 부끄러움 없이 흐르는군요.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나의 집

그녀가 살고 있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세요.

브라질, 혁명은 계속된다

...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1964년 4월, 쿠데타가 일어났을 무렵에 브라질의 외채는 25억 달러였다. 그로부터 21년 후 군부독재가 종지부를 찍었을 때 외채는 1천억 달러를 넘어섰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지속되어온 군부독재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군정체제가 추구한 전략은 '국가의 치안'과 '통합 발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거의 남미대륙 전체 에 걸쳐 대대적인 감시와 억압, 민주주의자 색출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재원이 필요했다. '국가의 치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용도 지나칠 것이 없었다. 초기에는 수출입은행, 거대 민간 은행들, 그 뒤를 이어 국제통화기금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억 달러씩 지원함으로써 독재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필요한 자금을 댔다.

대대적인 국토 확장, 국토 재무장, 독재의 주역인 육·해·공 3군의 재정비와 현대화 작업 등을 위해 공적 자금은 물론 북미 민간자본들이 수백억 달러씩 투입되었다. 이 돈들은 수출입은행과 민간 은행, 국제통화기급 등을 통해 브라질로 유입되었다.

한편 '통합 발전' 전략은 도로망 건설과 신도시 건설 등을 통해 브라질의 인구 저밀 지역을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서 첫 번째로 선정된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열대삼림 지대인 아마존 강 유역이었다. 아마존 강 유역은 무려 6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군부독재가 계속된 21년 동안 10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삼림이 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이렇게 해서 얻은 땅의 90퍼센트 이상은 거대 다국적 농가공 식품업체나 목축업체들에게 분배되었다. 삼림은 불태워 일군 땅 위에 북미 농가공 식품업체나 거대 다국적 목축업체들은 방대한 고무나무나 캐슈, 밀 농장들, 혹은 조방 농법에 따라 소를 기르는 데 필요한 초지 등을 건설했다.

수십만 명의 보이아 프리우들과 무농지 농업 노동자들이 북부나 북동부의 황폐한 지역으로부터 파라, 아크리, 론도니아 등의 아마존 인근 지역으로 실려왔다. 이들은 거의 반 노예상태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도로와 신도시 건설, 삼림 벌채, 노동자들과 식솔들의 이송과 정착, 기반 시설 건설, 거대한 댐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에 필요한 경비는 물론 외국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부채는 브라질 정부가 자국에 정착한 다국적 기업들에게 브라질 내에서 얻은 이익과 로열티의 본사 송금이나 그 외 재정 부문에 대해 지나치게 좋은 조건을 수락한 탓에 한층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9년 말 미국은 급작스럽게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러자 브라질에 위기가 닥쳤다.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해 군부는 다시금 미국의 민간 은행들, 특히 시티은행으로부터 외채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1979년과 1985년 사이에 군 장성들이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황 명목으로 송금한 총액은 이들이 새로이 얻은 외채보다 210억 달러나 많았다.

1985년 군인 출신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 호세 사르네이가 정보부 수뇌 출신 마지막 군부독재자 피게이레두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는 보통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ARENA(군인들이 설립한 정당)에 의해서 지명된 대통령이었다. 호세 사르네이 대통령은 부채 상환의 잠정적인 연기를 명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은 다시금 지옥 같은 부채의 기제에 휘말렸다. 부채를 갚기 위해 다시 부채를 얻어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부채를 한 번 얻을 때마다 상환 조건이 나빠졌으므로, 브라질로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계속 빠져들어가는 형국이었다.

브라질이 상환한 270억 달러라는 액수는 브라질리아 국고에서 나온 돈이다.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동안 고금리 정책을 고집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고, 또한 정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최대한 많은 자본을 브라질 국내로 끌어들어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금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금리였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았다. 이 고금리 정책은 브라질 국내 경제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지나치게 높은 금리 때문에 브라질의 중소업체 대표나 자영업자, 상인들 가운데 기업 확장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감히 은행 대출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이미 대출을 얻은 기업들(또는 부동산)조차도 기업 활동을 축소하여 재무구조를 건정하게 만들어야 했고, 따라서 사무직원이나 노동자 수를 줄여야 했다.

고금리 정책은 또 다른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 투기를 부추긴 것이다. 국내외 투기자들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10퍼센트에서 12퍼센트의 금리로 개인적인 대출을 받아, 천문학적인 금리를 보장하는 브라질의 국채를 사들였다. 지불 불능 사태에 대비해서 반드시 들어야 하는 보험을 계산에 넣더라도, 이는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땅 짚고 헤엄치기 식 돈벌이였다.

오늘날 브라질의 외채는 뱃속에는 기생충이 들꿇고,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며, 돌아갈 가정도 없어 절망 속에서 거리를 배회하는 비쩍 마른 어린이들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난 본드를 피워요. 나한텐 미래의 삶이라는 게 없거든요." 헤시피의 카르무 수도원의 계단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아이는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 나에게 항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장의 신뢰'라는 표현이다. 국가 또는 국민은 세계화된 자본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지 않기 위해서, 자본 앞에서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경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뢰란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 걸까? 몸과 마음과 정신 모두를 바쳐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니 오로기 그렇게 할 경우에만 수치의 제국을 움직이는 제후들은 프롤레타리아를 도와주는 은혜를 베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그림자가 집단 상상력을 좌우한다. 그의 유령은 브라질리아의 플라날투 대통령 궁에서도 배회한다.

구리 광산 국유화(특히 지구상에서 가장 큰 노천광산인 추키카마타 광산), 인민연합이 제시한 110가지 사회개혁 프로그램 추진, 거대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법인세 신설 등의 정책을 통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대 말부터 이미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았다.

워싱턴에서는 비밀리에 40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다국적 기업이 인터내셔널 텔레폰 앤드 텔레그라프(ITT)의 회장 그린이 주도한 이 위원회에는 칠레에서 활동 중인 40개의 가장 중요한 회사들이 참여했다. 아나콘다와 케네코트 같은 광산 연합 외에 전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기업 연합들의 상당수가 참여한 셈이었다.

1970년 말부터 닉슨과 키신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이 위원회는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과 금융개혁 체제에 번번이 반기를 들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도심에 자리 잡은 모네다 대통령 궁은 펜타곤의 조종을 받는 전투기와 무장 장갑차들의 공격을 받았다. 오후 2시 30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궁 2층에 자리한 그의 집무실에서 머리에 총을 한 방 맞은 채로 숨졌다. 그 후 들어선 독재정권은 피비린내 나는 억압 정책을 펴나갔다. 칠레에 길고 긴 어둠의 나날이 찾아온 것이었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브라질, 혁명은 계속된다'中 -

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 2

... 2003년 2월 4일 저녁, 내가 늦은 시간에 브라질리아의 플라날투에 있는 브라질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자 몸집이 크고 유쾌해 보이는 금발의 남자가 광장에서 내 앞을 막었다. 남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생은 즐겁게'식 사고 방식은 전염성이 강했다.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온 우리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얼싸안았다.

지능과 에너지를 겸비한 조앙 스테딜레는 산타카타리나로 이민 간 티롤 지방 농부의 후손이었다. 무농지 농촌 노동자 운동을 이끄는 9명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손꼽힌다. 룰라 대통령, 농업부장관과 악수하는 그의 모습은 지에 전설이 되었을 정도다.

"자네, 내일 뭐 할 건가?" 그가 나한테 물었다.

"리우데자네이루행 비행기를 탈 걸세. 제네바로 돌아가야 하니까."

"말도 안돼! 내일 자네는 리슈(쓰레기 하치장-옮긴이)에 가야 하네. 거기에 가보지 않고는 이 나라 정부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을 걸세. 새별에 가야 하네. 관용차를 타지 말고, 유엔 직원들도 동행하지 말게. 택시 타고 혼자 갔다 오게." 티롤 출신 농부는 도저히 어기면 안 될 것 같은 투로 마랬다.

나는 새별에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벌써 해가 높이 올라와 있었다. 급히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택시에 올라탔다. 아침나절 브라질리아의 교통 혼잡은 파리에서보다 더 지옥 같다. 우중충하게 잔뜩 흐린 하늘에서 열기가 내려왔다. 내가 묵고 있던 아틀란티카 호텔은 시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쪽에 위치한 시립 쓰레기 하치장까지 가는 데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브라질리아에는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하루 24시간 내내 어어지는 트럭의 행력은 실어온 쓰레기를 하치장에 내려놓는다. 3제곱킬로미터에 걸쳐 거대한 쓰레기 피라미드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쓰레기 하치장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철제 울타리 앞에서는 군대 경찰에서 파견한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 그 주위로는 짙은 파란색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기관총과 검은 고무로 된 긴 막대기를 든 채 경비를 서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2만 가구가 모여 산다고 알려져 있는 빈민촌이 도심의 마지막 고층 건물과 청제 울타리 사이의 공간에 펼져진다. 종이 상자를 펼친 골판지와 나뭇조각, 골진 양철 지붕들이 바다처럼 일렁거린다. 이곳은 기아의 희생자, 라티푼디움의 희생자, 고이아스 주의 농지를 독점하고서 소작인들은 내좇은 대규모 농가공 식품업 연합의 희생자, 일용직 농업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의 모여 사는 곳이다.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600명가량의 장년 남자들과 젊은이들의 그날그날 하치장에 들어갈 수 있는 표를 지급받는다. 600명을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곳 군대 경찰의 관습을 아는지라, 아마도 부패가 이 표를 분배하는 데에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커다란 검은 눈의 어린아이들, 한눈에 척 봐도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그래도 좋다고 떼를 지어 뛰어다닌다. 뚜껑 없는 하수도와 굶주린 개들, 판잣집들과 아이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커다란 덩어리를 이룬다. 아이들이 택시를 에워싼다. 웃으면서 손뼉을 치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 사이를 뚫고 나와 초병이 있는 곳으로 간다. 대위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린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스테딜레가 전날 전화를 해놓은 모양이다.

'조금 더 일찍 오실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대위가 입을 연다.

엄마가 의 품에 안긴 젖먹이들의 눈과 입, 코에는 보라 빛깔의 파리들이 들러붙어서 윙윙 소리를 낸다. 곳곳에 배설물이 널려 있다. 파리 떼들은 배설물과 젖먹이들의 코 사이를 부지런히 왕복한다.

브라질에서 군대 경찰은 프랑스의 헌병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군대 경찰은 브라질 연방공화국을 이루는 각각의 주의 주지사들의 지휘를 받는다. 대위는 서른 살 전후의 나이로, 흑밸 혼혈인 특유의 섬세한 얼굴 윤곽과 칠흑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활기 넘치며,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초소 주위와 철제 울타리 너머 쓰레기가 쌓여 있는 진흙탕 속을 서성거리는 '가난뱅이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위의 말은 매우 예의 바르고, 방문갱의 질문에 적절하게 응답했다. 그는 나의 방문을 무척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선생 같은 유럽인들은 모두 부자입니다! 당신들은 모든 걸 태워버리죠!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가난합니다. 쓰레기 하치장은 이 근처에 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은 나뭇조각 하나, 알루미늄 조각 하나가 이 빈민촌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게 되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상자들은 도매상들에게 팔립니다. 알루미늄 상자, 맥주 깡통들은 납작하게 만든 다음 팝니다. 수집된 유리들도 팔리죠. 수완 좋은 리셰이루(lixeiro,리슈에서 일하는 사람-옮긴이)라면 하루에 5레알 정도는 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음식물 찌꺼기, 채소, 과일 가축 배설물 등으로 돼지를 치죠. 쓰레기 하치장 덕분에 선생님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지역 전체가 살아갈 수 이쓴느 겁니다." 대위는 팔을 내밀어 그의 앞에 펼쳐진 하치장과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 숲을 갈라놓는 공간 안에 최대한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군대 경찰은 쓰레기 더미가 피라미드처럼 쌓인 하치장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아침에 표를 나눠주고 하치장 출입을 관리할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죠. 아이들한테는 위생상 좋을 게 없거든요."

대위는 나한테 이가 모두 빠져버린 덩치 큰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60세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아래위로 군데군데 기름때가 낀 갈색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까 다리가 하나뿐이었다. 무슨 색이라고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빛깔의 밀짚모자가 남자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남자는 안색이 창백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역한 냄새도 풍겼다. 남자의 시선은 무기력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연신 비굴하게 굽실거렸다. 나는 남자에 대해서 거의 즉각적으로 반감을 느꼈다.

"이 사람은 페이토르입니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을 관리 감독하죠. 이자는 하치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각자 어느 곳으로 가서 일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잠깐만 한눈팔면 싸움이 그치질 않는다니까요."

밀짚모자를 쓴 남자는 두 명의 피스톨레이루를 불렀다. 그의 부름을 받자 흑인 두 명이 나타났는데, 남자의 경호원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함께 (쓰레기) 산길로 접어들었다. 목발에 의지해서 걷는 서글픈 모습의 외다리 반장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20분쯤을 걸어서 겨우 도착했다.

나는 악취 때문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쓰레기 산들 사이로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가는 통에 양옆으로 하수용 배관까지 거느린 널찍한 길은 마치 협곡 같았다. 도로에는 여기저기 홈이 파여 있었다. 짐을 실은 무거운 트럭의 바퀴들이 남겨놓은 자국들어이었다. 트럭은 무게 때문에 비틀거렸다.

끝에 쇠로 만근 갈고리가 달린 긴 막대기를 들고 노인들과 청소년들이 쓰레기 피라미드 위로 올라갔다. 나이 든 남자들은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에는 쓰레기 하치장 입구에 들어선 코카콜라 매장에서 지급한 챙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고양이만큼이나 몸집이 큰 쥐들이 젊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녔다. 이들 젊은이들의 대다수는 뼈만 앙상했으며, 입 안에는 이미 제대로 된 치아리고는 없었다. 이들은 고무 샌들 차림이라 작업 중에 쉽게 상처를 입었다. 젊은이들은 맨손으로 쓰레기를 분리해서 종류별로 정해진 위치로 운반했다. 아들, 아버지, 사촌이 함께 나귀에 맨 수레를 밀었다. 못쓰게 된 타이어 두 개위에 엉성하게 짜맞춘 수레였다.

수레마다 각기 다른 물품을 운반했다. 어떤 수레에는 수레가 찌그러질 정도로 많은 상자와 폐지들이 실려 있는가 하면, 어떤 수레에는 금속성 폐기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각종 유리병들과 깨진 유리 조각을 싣고 있는 수레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 중간 상인들은 울타리 반대쪽 입구 근처의 공터에서 물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물을 실은 수레가 다연 압도적으로 다수였다. 말이 좋아 음식물이지, 사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의 죽 같은 것들의 회색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긴 채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양동이 속에는 밀가루, 쌀, 말라비틀어진 채소, 고기 조각, 생선 대가리, 뼈 등이 제멋대로 섞여 있었다. 이따금씩 죽은 토끼나 쥐들도 눈에 띄었다. 하여간 모든 양동이마다 심한 악취가 풍겨 나왔다.

수레마다 보랏빛 파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파리들의 끝없는 행진이 빚어내는 웅웅거림으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파리들은 젊은이드르이 병든 눈가나 노인들의 앙상한 다리에도 제멋대로 달라붙었다. 나는 작업반장에게 양동이 속에 든 내용물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돼지 먹이용"이라고 그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의 손에 10레알짜리 지폐를 한 장 슬며시 쥐여줬다.

"나는 관광객이 아니오. 나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반드시 알아야겠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업반장은 나의 임무 따위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10레알짜리 지폐에는 무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배를 곯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가 변명이라도 하듯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두 명의 경호원을 거느린 이 무기력한 사나이가 그제야 내 눈에 호의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中 -

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 1

...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부자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 남반구가 북반구, 특히 북반구의 지배계층을 위해 돈을 댄다. 오늘날 북반구가 남반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부채를 제공하고 그에 대해서 받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흘러들어오는 자본의 양은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흘러들어가는 자본의 양을 초과한다. 가난한 나라들은 해마다 부자 나라의 지배계층에게 자신들이 투자나 협력 차관, 인도주의적 지원 또는 개발 지원 드의 형태로 받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한다.

2006년 북반구 선진 산업 국가들이 제3세계 122개국의 개발을 위해 지원한 돈은 580억 달러였다. 같은 해 제3세계 122개국은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황 명목으로 북반구 은행에 포진한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에게 5,010억 달러를 지급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 속에서 부채는 그 자체로 구조적 폭력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국민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기관총이나 네이팜탄, 탱크 다위는 필요 없다. 부채가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 부채는 두 부류의 인간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 다시 말해서 외국 채권자들과 해당 국가의 지배계층 구성원들이다. 우선 채권자들의 경우를 보자.

채권자들은 채무국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매우 엄격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제3세계 국가들은 빌린 돈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에서 통용되는 이자율보다 5배에서 7배쯤 높게 책정된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은 몇 개 되지도 않는 이들 국가의 기업들이나 탄광, 실속 있는 공공서비스(전화 사업 등)을 민영화하거나 외국(채권자들 자신)에 판매할 것을 종용하며, 군대의 무장을 위해서 외국(채권자들의 나라)의 무기를 구입하도록 촉구하는 식이다.

부채는 또한 채무국 지배계층 구성원들에게도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남반구에 위치한 상당수 국가의 정부는 결국 자국민의 극소수, 이른바 '매판 상인(comprador)' 즉 콤프라도르들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매판 상인이란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가? 두 가지 부류의 사회 계층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부류. 식민지 시대엔 외국 주인들이 원주민 보좌관들을 필요로 했다. 주인은 원주민 보좌관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주고, 그럴듯한 지위를 부여했으며, (소외된) 계급의식을 심어주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같은 계급의식은 식민지 시대가 끝나 주인이 떠나간 후에도 계속 남게 되었고, 이들은 식민지 시대의 마감과 더불어 세워진 독립 국가의 신진 지도계급이 되었다.

두 번째 부류. 남반구 국가들의 대다수는 오늘날 경제적으로 외국자본과 거대 다국적 민간 기업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외국의 열강들은 채무국 현지에서 지도자와 현지 간부들을 고용하며, 이들은 현지에서 일어나는 상거래를 위하여 현지 변호사들과 기자들에게 자금을 댄다. 이들은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주요 군 장성 및 경찰 수뇌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바로 매판 상인들의 두 번째 부류다.

콤프라도르는 '사들이는 사람'을 뜻하는 스페인 말이다. 콤프라도르 부르주아라고 하면, 새로운 봉건제후들에게 매수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들을 낳아준 민족이 아닌 남의 나라 출신 봉건제후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인 호스니 무라바크는 부패와 배임으로 똘똘 뭉친 정권을 지휘하고 있다. 그가 펼치는 국내 정치나 지방행정은 전적으로 그의 후견인격인 미국 정부의 법령과 이익을 대변한다.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의 지도자다. 미국의 정보조직이 그를 보호하고 지지한다. 그는 매일 워싱턴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다. 온두라스나 과테말라의 라티푼디움 소유주,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의 지도자 계급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이들의 이익은 현재 이들 나라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거대 다국적 민간 기업들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국가의 기본적인 이해관계, 국민들의 생존과 직결된 수요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 콤프라도르 계급은 너무나 오래전부터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애국심으로 포장된 이들의 발언이 너무도 공격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당연한' 지배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들이 주인으로 모시는 세계화 지상주의자들 옆에 붙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피지배적인 상황에 놓인 나라의 지배계층에게 국가의 부채는 많은 이권을 보장한다. 가령 멕시코,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콩고민주공화국, 방글라데시 등의 나라가 댐이며 도로, 항만 시설, 공항 등의 사회기반 시설 건설을 계획한다면? 이들 나라에 최소한의 학교와 병원이 필요하다면? 두 가지 해결책이 가능하다. 첫째, 누진세율에 따라 세금을 거둔다. 둘째, 외국 은행 차관단과 협상을 해서 차관을 얻는다.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도 안되지!

외채를 끌어다 쓴다고? 그보다 더 쉬운 일은 없지!

제3세계 국가 대다수는 거의 전적으로 콤프라도르 계급의 이해관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두 번째 해결책을 선택한다. 그때마다 외국 은행 차관단은 이들의 말 한마디에 얼른 돈을 내준다.

그런데 이 부채라는 것은 현지 지배계급 구성원들에게는 수많은 이익을 안겨준다. 거액의 부채를 끌어와서 건설한 사회기반 시설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이들이다. 국가가 외채를 들여와서 제일 먼저 건설하는 것은 도로이며, 그 덕에 이들은 자신들의 거대 영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항만 시설을 건설하면 영지에서 수확한 면화, 커피, 설탕 드의 수출이 용이해진다. 육지 교통이나 항만 설비뿐 아니라 국내 항공 노선도 개설하게 되고 병영이나 구치소도 순차적으로 건설하게 된다...



... 한 나라가 북반구 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등의 채권 기관에 이자 지불이나 원금 상환을 거부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지불을 거부하는 국가에 대해 파산을 선고하는 공식적인 절차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법은 침묵을 고수한다. 하지만 관례적으로 볼 때, 지불 불능 상태의 국가는 전부 또는 일부 변제 불능 선고를 받은 민간 기업이나 개인과 독같은 대접을 받는다.

예를 들어보자. 약 20년 전에 알란 가르시아가 이끄는 페루 정부는 재앙에 가까운 자국의 재정 상태로는 브레턴우즈 기관들과 외국 민간 은행으로부터 얻은 외채에 대한 이자 지급과 원금 상환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전체 외채 중에서 30퍼센트만 상환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는?

어육 분을 싣고 항해 중이던 페루 선박 한 척이 함부르크 항구를 지날 무렵 독일 은행들로 구성된 채권단의 요청으로 독일의 사법 당국은 이 선박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 페루 공화국은 수준 높은 국제적 항공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페루 정부가 일방적으로 외체의 일부분에 대해서만 이자를 지급하고 원금도 일부분만 상환하겠노라고 발표한 직후부터 뉴욕이나 마드리드, 런던 등 세계 주요 공항에 착륙하는 페루 소속 비행기들은 해당 채권자들의 요청에 따라 발이 묶였다.

요컨대 자국만의 완전한 자치주의를 고수하며 폐쇄정책을 밀고 나갈 작정이 아닌 한, 오늘날 제3세계의 그 어떤 채무국도 고의적이고 일방적으로 채무 변제 불이행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모든 국제 교류의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中 -

탐욕의 시대는 어떻게 봉건화되는가?

...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홍보부처를 두고 있다. 공식 명칭으로는 대개 기업 커뮤니케이션 부서라고들 한다. 이 부서에서는 신흥 봉건제후들이 여론에 주입시키고자 하는 세계관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이를 옹호하며 널리 알리고 정당화시키는 일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장-폴 마라는 벌서 2세기나 앞서서 오늘날 광고나 PR계의 말재주꾼들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여론이라는 것은 무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무지는 극단적인 독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 사물에 대해서 건전하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에만 집착할 뿐이다. 로마인들도 카이사르에게 그가 왕이라는 지위를 가졌을 때에는 거부했던 권한을 황제라고 이름을 바꾸니 아무 저항 없이 내어주지 않았던가? (.....) 말에 현혹되는 사람들은 아무리 파렴치한 사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만 되어 있다면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칭송받아 마땅할 사물들이 아름답지 못한 말로 묘사되면 그것을 혐오한다. 그러므로 행정부의 일상적인 업무란 말의 뜻을 왜곡함으로써 민중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 신량특별조사관이라는 나의 직책 때문에 나는 이들 신흥 봉건 제후들과 토론을 나눌 때가 종종 있다. 논리에서 밀리거나 자신들의 결정이 초래하는 참담한 결과로 화제가 옮겨갈 때마다 신흥 봉건제후들이 어김없이 내세우는 변명이 있다. 바로 '소통 부족'이다...



... 경쟁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사납고 맹렬하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상대방을 먼저 배려해주는 경우란 없다. 매 순간이 치열한 전쟁의 연속이다.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할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은 늘 맹렬하고 냉소적이며 냉정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얼마간의 공감을 느끼는 인류애라는 명분 때문에 이윤 극대화라는 절대 절명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건 곧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딜레마를 겪는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은 적지 않다.

네슬레의 책임자인 페터 브라벡의 예를 들어보자.

에티오피아에서는 720만 명의 남녀노소가 기아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커피다. 커피야말로 에티오피아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3년 전부터 생산자들에게 지불되는 값이 급락하고 있다. 따라서 수백만 명의 농부들의 가정은 와해되거나 대도시 주변 빈민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거리를 배회하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브라벡은 세계 시장에서라면 얼마 안 되는 값에 구입할 수 있는 원두에 대해서 에티오피아 농부들의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높은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인가? 혹은 오늘날 무소불위의 네슬레를 있게 만든 이윤 극대화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그의 경쟁자들인 아처 다니엘스 미들랜드, 유니레버, 혹은 카길 들이 커피시장에서 네슬레를 거꾸러뜨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요제프 아커만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은행인 도이체 방크의 회장이다. 그는 스위스 루체른 태생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다. 그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국가들이 겪고 있는 부채의 극심한 폐해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채에 대한 전략을 바꾸는 않는다. 만일 그가 일방적으로 채무 변제를 포기한다면, 이는 수천만 명의 삶을 구해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세계 자본시장에서 도이체 방크의 위상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득을 보는가? 물론 그의 경쟁자들인 크레디 스위스 그룹이나 J.P 모건 체이스 맨해튼 은행 등이 덕을 보게 된다.

부채와 기아 덕분에 나날이 번영하고 있는 세계화된 자본주의 맥락에서 선택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끈끈한 연대의식을 지닌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면, 그들이 세운 제국이 와해될 것이고, 반대로 그들이 연민이나 인류애 등을 지옥에 던져버리고 사납고 냉소적인 야수처럼 행동한다면 투자가 증대되고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속구칠 것이며, 발밑엔 시체가 즐비하게 널릴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이들 신흥 봉건제후들이 그들의 활약을 통해서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액수의 보수를 고려한다면, 연민의 길을 택해서 제국을 와해시키는 선택은 이들에게 결코 매력적일 수 없다...



... 다른 종(가령, 토마토나 감자, 염소 등)의 유전자 하나를 이식받은 쌀은 기후 변화에 강한 벼이삭을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건조한 토양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거나 더 많은 이삭을 맺는다거나 살충제가 필요 없다거나 하는 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렇듯 유전자 변형이 이루어진 식물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곡물을 생산하게 된다는 양면을 지닌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 바꿔 말해서 광우병만 봐도 이 문제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식물의 유전자 변형은 다른 종의 유전자를 이식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식을 통해 이루어진 염색체가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이 보기엔 유전자 변형 식물이야말로 천문학적인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특허권으로 보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형된 종자를 사용하는 농부가 지난해의 수확에서 다음 해의 수확을 위해 일정 비율의 종자를 남긴다면, 농부는 이 종자의 특허권을 가진 거대 다국적 기업에 일종의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 농부가 유전자 변형된 종자를 사용하되 그 종자가 번식이 불가능한 종자라면('터미네이터' 특허), 농부는 해마다 기업으로부터 새로 종자를 사들여야 한다.

유전자 변형 유기체의 생산과 보급은 자본주의 추종자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생물과의 불공정한 경쟁을 근원부터 차단하겠다는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자연, 즉 생명은 식물이나 인간, 먹을거리, 공기, 물, 빛 등을 무료로 생산하고 얼마든지 재생산한다. 자본주의자들에게 무료로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공재산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자들은 무료라는 것을 끔찍하게 혐오한다...



... 세계식량계획은 재난을 당한 지역에 수만 톤의 식량, 특히 옥수수를 긴급 지원했다. 이 옥수수의 상당 부분은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100퍼센트 유전자 변형된 품종의 옥수수였다.

2002년 10월 12일, 잠비아 대통령은 국제적인 스캔들을 일으켰다. 상당수 잠비아 국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옥수수를 '독이 든 식량'이라고 비난하며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세계 식량계획 측에 '독이 든 식량' 배분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나의 기자 회견이 끝나갈 무렵 아프리카의 한 젊은 여기자가 잠비아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형적인 스위스인답게 매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국제학계는 유전자 변형 생물이 공중보건에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을 놓고 양분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유전자 변형을 거쳐 만들어진 혼합 식량을 섭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생물학자도 의사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이 문제에 관해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학 있으며, 따라서 유전자 변형 생산물의 유통을 금지하고 (유럽연합은 동물 사료용 혼합 콩의 유통만을 인정하고 있다)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은 워싱턴 행정부와 공개적인 갈등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문제 때문에 유럽연합을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 상태입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일에게 유전자 변형된 생물의 무독성을 의심할 권리가 있다면, 잠비아 대통령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겠죠. 따라서 나는 아프리카의 거부가 정당하다고 봅니다."...



... 유전자 변형 생물에 관한 갈등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걸려 있는 절박한 문제다. 미국 농가공 식품업계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자신들이 보유한 종자들과 자신들이 새로 개발한 제품들을 파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 특히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 업체들은 유전자 변형 생산품 금지 조항을 피해가기 위해 순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고 있다.

이들 업계의 선두주자가 바로 몬산토 사다. 백악관에서 이 회사의 입김은 대단하다. 세계유전자 변형 종자(관련 제품 포함) 시장의 개방이 몬산토 사의 최우선 과제다. 몬산토 사가 세계에서 가장 큰 유전자 변형생물(GMO) 생산 기업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7천만 헥타르의 GMO 경작지 중의 90퍼센트가 몬산토 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 볼리비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볼리비아 정부는 세계은행의 압력에 못 이겨 공공 상수도 망을 민간 기업에 팔았다. 계약이 체결되자 민간 기업들은 서둘러 물값을 2배로 올렸다. 이는 대다수 볼리비아인들이 식품비보다 훨씬 비싼 물값을 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수도사업의 독점권을 민간 기업에게 이양할 경우, 사람들의 허가 없이는 마을 앞 공동우물에서조차도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다. 대규모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나 소규모 소작농들 모두 자기 땅에서 빗물을 받아 쓰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허가증을 사야만 한다.

그렇지만 볼리비아인들, 특히 에보 모랄레스에 의해 조직화된 인디언 주민들은 이런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볼리비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센 저항 앞에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민영화 법안을 철회했다(가장 격렬한 폭동은 코차밤바에서 일어났다. 이 도시에서 식수 사업자 권리를 따낸 회사는 미국의 거대 다국적 기업인 벡텔 사였다.)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네슬레는 가장 막강한 식수 공급망을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수 사업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자다. 파키스탄의 경우를 보자.

몇 년 전 파키스탄의 언론에서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벌어졌다. 네슬레 측에서는 이 캠페인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예방 캠페인'에서는 카리치나 물탄, 라호르, 이슬라마바드, 라왈핀디 등의 공공 상수도 시설을 통해서 공급되는 물이 비위생적이고 건강을 위협하므로 이를 저지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물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기준에 합당한 물이었다.

이 '예방 캠페인' 소동이 있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네슬레는 파키스탄에서 낱개 병으로 포장된 생수 판매를 시작했다. 네슬레 사의 마케팅 귀재들은 이 생수에 '퓨어 라이프'라는 기가 막힌 이름을 붙였다.

닐스 로즈만은 그의 저서 『파키스탄의 식수 위기, 병에 담아 파는 식수 문제. 네슬레의 류어 라이프의 경우』에서 파키스탄 네슬레 사가 챙긴 천문학적인 액수의 이익과 극단적인 냉소주의적 전략에 대해 파헤쳤다(2005년 이슬라마바드에서 출판)...



...이윤 극대화라고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희한하게도 가장 중요한 이 과제에 대해서만큼은 브라벡의 '경영 관리 원칙'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수도사라면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관행을 요구한다. 냉전시대에는 갑작스러운 가격 하락을 막고, 가격 하락으로 인해 생산자들이 공산주의 쪽으로 경도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상산자와 구매자 사이에 협약이 이루어져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된 오늘날에는 세계무역기구가 과거의 협약을 하나하나 무효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베베이 네슬레 왕국에 군림하는 수도사는 세계무역기구의 방식을 누구보다 열렬히 선호하는 사람이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탐욕의 시대는 어떻게 봉건화되는가?'中 -

매트릭스와 헤게모니

영화 매트릭스는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찬 영화입니다. 키아누 리브스가 열연한 주인공은, 토머스 앤더슨에서 네오(Neo)로 이름이 바뀝니다. Neo는 New 입니다. 이는 주인공이 ‘깨달음’을 통하여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육당하던 ‘유기체’에서, 이제 자유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려면 ‘자각’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교묘한 전략, 교묘한 논리에 속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피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처지를 제대로 ‘자각’하는 것만큼 권력집단에게 위협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각’을 위해서는, 매트릭스가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접합’이라고 부르는 수법입니다. 접합은 단어와 단어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의미와 의미, 개념과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범 김구 선생’ 과 ‘테러리스트’ 를 결합시키려고 듭니다.

‘일제시대’ 와 ‘근대화’ 를 결합시키려고도 합니다.

‘부자 감세’ 와 ‘경제성장’ 을 결합시키려고도 합니다.



이런 사례들이 접합을 시도하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은 속이기 쉽다,



히틀러가 한 말입니다. 대중을 속일 때 사용하는 수법이 ‘접합’입니다. 접합을 통해 어떤 의미나 개념에 전혀 새로운 의미와 위치를 부여하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려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접합’이라고 부릅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접합시키려고 드는 것을 ‘딱지 붙이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자각’을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 사회구조는 그 속에 놓인 사람에게는 그게 전부인 것, 고정된 것, 바꿀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물고기로 하여금 물 밖으로 펄쩍 뛰어올라 ‘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역사’ 공부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현재의 사회구조가 일련의 헤게모니 과정에 있어서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현재의 순간이 그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 그리고 지금의 순간을 거쳐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예측도 해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수정해 나갈 수도 있겠다, 는 비전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역사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점들입니다.




- 세일러, 다음 아고라 경제 토론방, <매트릭스와 헤게모니> 중,2009.01.01

한예종 학생의 글

http://blog.daum.net/cinephile85/802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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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이건 참...

이정도면 국가적 손실 아닌가?

자라나는 지식인들보다는 코드가 중요...하겠지...

주식관련

세일러,상승미소,SDE,나선 님들, 그리고 미네르바 님,... 그녀생각,양원석 님 글도 애독하고있으며, 김광수경제연구소 글도 애독하고있습니다.



http://agora.media.daum.net/profile/list?key=GzmJaBl9eZM0&group_id=1

▶◀2009년 5월 25일 오전 4시 13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출처 ★야마꼬★ | 야마꼬
원문 http://blog.naver.com/icebug58/150048136687 이 저작물은 아래 조건 만족 시
별도 허가 없이 사용 가능합니다

저작자 명시 필수
영리적 사용 불가
내용 변경 불가



사람이 나서 살다보면 어떤이들은 자랑스러운 시대를 만들고,

어떤이들은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다.

다음 세대는 이를 평가하여 감사하거나,원망할 자격이 있다.



나는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 한명이 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운역사를 만든 세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세대는 우리를 원망하는것을 주저하지마라

그리고 너희는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마라

[스크랩] 경상도의 불편한 진실...(절대 비하 아닙니다)

원문출처링크: http://www.penfo.co.kr/bbs/zboard.php?id=free&no=205374









장문의 글이지만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꼭 읽어보시길 부탁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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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분위기면 당장 반한나라당 대통령이 나오겠지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앞으로 3년이나 남아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분위기가 3년동안 지속될 수 있을까요? 단 3개월이나 갈까 모르겠네요...

이 글이 많은 논란이 될 수 있는 글임을 압니다.
반면으론 이 글을 보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이 올라오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얼마전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를 기억해 보시길...)

우리 모두 지금의 아픈 마음을 앞으로 3년만 잊지말자....이거 너무 힘든 주문일까요?
저는 뼈속 깊이 세길랍니다. 잊지 않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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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될것입니다.
득표율은 대략 45%내외 약 1100만표 정도 득표할 것입니다.
수도권(인천제외)에서 500만표 조금 못미치고 그리고 경상도내에서 500만표정도 득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외 지역에서 100만표정도 더 득표해서 1100만표로 대선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박근혜가 병이나 사고로 쓰러지거나 죽지 않는한 2012년 대선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자 대통령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렇게 당연하게 예언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돌아보면 됩니다.
과거 총선과 대선의 투표성향을 분석해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것이라는걸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 보수 혹은 진보의 대립? 군대? 돈? 전과?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지역]입니다.
한국정치를 경제 보수/진보 이런걸로 백날 분석해봐야 50%도 제대로 분석이 안됩니다.
그럼 지역으로 분석해보면.. 약 90%이상 분석이 가능합니다.

1997년 대선부터 분석을 해봅시다.
이때 한나라당후보(당이 하도 이름을 많이 바꿔서 그냥 한나라당으로 통일)인 이회창씨는 전국적으로 38% 약 1천만표 조금 못미치는 득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후보(역시 당이 하도 이름을 많이 바꿔서 그냥 민주당으로 통일)인 김대중씨는 전국적으로 40% 1천만표 조금 넘치는 득표를 했습니다.
1997년 12월 대선을 한달 앞두고 한국은 imf에 들어섰습니다.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된 것을 이 imf로 인해서 정권교체가 되었다고 분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틀린 것입니다. 정권교체가 된것은 imf때문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언제나 지지하던 경상도가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인제씨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출마해서 약 15%이상 득표했습니다. 15%면 약 400만표 정도 됩니다.
원래 이표의 절반이상은 이회창씨에게로 갈 표들이었습니다. 근데 그것을 이인제씨가 중간에 가로채서 김대중씨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입니다.
1997년 대선은 imf에 들어가고 한달만에 치뤄졌습니다. 근데 imf를 몰고온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씨가 38%나!! 득표했습니다.
이 표들이 다 어디서 온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대부분 경상도에서 온 것들입니다. 절반이상 약 70%가 경상도에서 그리고 수도권에 사는 경상도 출신들이 함께 던진겁니다.
참 웃긴 나라이지요?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하는 imf당시에도 경상도에서는 imf를 몰고온 한나라당 후보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2000년 총선을 살펴봅시다.
이때는 imf를 극복한지 얼마 안되던 시기였고 대통령은 김대중씨
한나라당은 이회창총재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한나라당은 39%(7백30만) 득표했습니다.
그럼 민주당은? 35.9%(6백70만) 득표했습니다.
imf를 몰고와주신 고마운 한나라당이 더 많이 득표했습니다.
의석수로 따지면 전체의석 273석중에서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133석(과반은 137석입니다. 4석 모자랍니다)을 차지했습니다.
어이쿠 imf를 몰고온 정당이 많이도 차지했군요. imf가 별로 힘들지 않았나봅니다. ^^

2002년 대선 살펴봅시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48.9% 1천200만표 득표해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46.6% 1천100만표 득표해서 떨어졌습니다.
한나라당 후보에게 46%나 표를 던졌습니다. 1위와의 표차는 1997년처럼 2%밖에 차이가 안났습니다.
1997년에 비해서 득표율이 높아진것은 이인제씨같은 중간에서 표를 가로채는 고마우신(^^)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왜 노무현 후보가 저렇게 많이 득표할 수 있었을까요?
몇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근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노무현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경상도에서 특히 경남과 부산에서 30%가까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2%의 작은 격차로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김대중씨는 imf당시에도 경상도 평균 지지율 15%를 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의 경상도내 평균 지지율도 마찬가지입니다.

2004년 총선 살펴봅시다.
탄핵때문에 말 많았습니다. 뭐 그때 분위기는 다 아실테니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열린우리당 총 152석
한나라당 총 121석 차지했습니다.
이것만보면 아무런 문제 없는것 같죠?
득표율을 봅시다.
정당지지율 득표에서 우리당은 38.3%
한나라당은 35.7% 득표했습니다.
2000년 총선과 비교해봐도 탄핵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 있었어도 한나라당 지지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4% 차이납니다.

자 그럼 2007년 총선 살펴봅시다.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이가 48.7%의 득표율로 1천1백만표 득표했습니다.
민주당 후보인 정동영씨는 26.1%인 6백10만표 득표했습니다.
이회창씨는 15.1% 3백50만표를 득표했습니다.

결과를 잘 보시면 뭔가 특이한게 보이지 않는지요?
한나라당 지지율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크게 차이가 없어요.
근데 민주당의 지지율은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이럼 또 "노무현이 정치를 못했고 민주당이 그래서 망했고 주저리 주저리" 하시는데요.. 그럼 김영삼은 정치를 잘해서 1997년에는 한나라당 뽑았나효? ㅎㅎ
1997년처럼 이인제씨와 같은 누군가가 나와서 민주당의 지지율을 갉아먹었다... 라고 말씀하시겠지만 애석하게도 이회창씨의 득표는 민주당표보다는 오히려 한나라당 표를 갉아먹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과거를 살펴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했지요..
지난 총선과 대선을 살펴보면 결론이 뭐냐...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이제 그걸 분석해봐야 합니다.
각 선거의 지역별 득표율을 알수 있다면 더 확실하겠지만 그건 좀 구하기가 힘든지라
그나마 구할수 있었던 2007년 대선의 지역별 득표율로 분석을 하겠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1천1백만표를 득표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약 1천 1백만표가 필요합니다.
그럼 이 표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었는가? 그걸 분석해봐야 합니다.

2007년 대선에서 한국의 총 투표인구수는 3천7백만명입니다.
투표인구수를 지역적으로 분석해보면... (아래의 인구수는 모두 만20세 이상 투표인구수입니다)

서울에 800만명 경기도에 820만명 총 1620만명이 수도권에 살고 있습니다.(인천제외)

경상도의 경우
부산 280만명
대구 190만명
울산 80만명
경북 200만명
경남 240만명
약 9백9십만명.. 쉽게 그냥 1천만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전라도의경우
광주 100만명
전북 140만명
전남 150만명
총 390만명.. 그냥 쉽게 400만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원도의 경우 110만명

충청도의 경우
대전 100만명
충남 150만명
충북 110만명
총 360만명입니다.

그외지역은 인천 200만명 제주 41만명입니다.


인구분포를 보면 뭔가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우리는 보통 선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함께 취급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절대 함께 취급될수 없습니다.
다른 지역 다 합쳐도 다시 말해서 전라도와 강원도 충청도 제주까지 전부 다 합쳐도 경상도의 인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숨겨진 한국 선거의 가장 큰 비밀이고 이게 한국선거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상도의 인구가 엄청나게 많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역들을 다 합쳐도 상대가 안될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자 이럼
"수도권과 서울이 있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데요.. 수도권이 어디있는데효?? 수도권이 뭔가효?
수도권은 지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수도권은 그 지역에서 오래 살던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도권의 인구가 가장 많은것은 수도권과 서울의 기존 주민들이 죽어라 애들을 만들어서 늘여놓은게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것입니다. 절반이상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과연 수도권내에 어느지역 출신 사람들이 가장 많을까요?

위에 적어놓은 인구수를 보세요. 상식적으로 따져봐도 경상도가 가장 많아야 정상일 것입니다.
물론 전라도도 많습니다. 왜냐면 전라도는 산업발전이 늦어져서 수도권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었습니다. 근데 그건 7-80년대의 얘기입니다.
지금 현재 경상도의 부산은 10년째 인구가 줄고있고 대구도 최근 2년간 인구가 줄었습니다.
그나마 산업이 발전된 경상도의 대도시들에서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왜냐? 경상도의 경기가 나쁘거든요.
부산 신문에서 10년째 맨날 떠드는 소리가 "부산이 산업발전 최악이야~~~ 징징징" 이 소리입니다.
경상도가 이전에 잘나가던 때에 비하면 경기가 많이 나빠져서 실제로 많은 인구수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인구수 분석에 이어 이제 득표율 분석을 하겠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의 득표율을 살펴보면
총 1천1백만표중에서
서울 259만표
경기 258만표
인천 56만표입니다
인천은 빼죠. 인천은 서울/경기를 비롯한 수도권과는 개념이 좀 다르니..
서울과 경기에서만 520만표 득표했습니다. 총 유권자 1600만명중에서 520만표 득표입니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한 경상도 살펴보겠습니다.
부산 101만표
대구 87만표
경북 103만표
경남 83만표
울산 27만표
총 401만표입니다. 총 유권자 1천만에 401만표 득표입니다.

수도권과 경상도만 합쳐도 900만표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필요한 표수는 약 1천만표-11백만표입니다. 수도권과 경상도에서만 900만표가 나옵니다. 헐~~~
다른 지역은 거의 볼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이해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 보겠습니다.
전라도는 제외하고 충청도와 강원도만 보겠습니다.

충청도
대전 24만표
충남 31만표
충북 29만표
강원도 37만표
다 합치면 121만표입니다. 충청도 전체와 강원도까지 합쳐도 이명박의 득표율은 부산시 하나에서 얻은 표수보다 쫌 더 많습니다.
(뭐 20만표가 쫌이라고 말하냐? 라고 따지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100만 1천만 단위를 논하고 있어요)

이제 쫌 감이 오시나요?
이럼 또 태클 들어오죠..
"그래봤자 경상도는 60%정도 아니냐? 저~기 전라도는 90%이상 민주당만 뽑는다" 라고 태클 들어옵니다.
전라도 투표수가 400만이라는건 위에 적었고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정동영씨는
광주 52만표
전남 76만표
전북 77만표
총 206만표(약간의 올림이 있습니다) 득표했습니다.
90%이상 지지해도 겨우 200만표입니다. 경상도는 60%만 지지해도 400만표입니다. 2배차이납니다.

이제 뭔가 좀 감이 오시는지요? 전라도에서 아무리 95% 이상 지지해도 인구수가 작기 때문에 선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는 머릿수가 많은 쪽이 유리합니다. 그럼 한국에서 가장 머릿수가 많은 곳은? 바로 경상도입니다.
그리고 그 경상도에서 꾸준히 지지해주는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입니다.


1997년 대선(김대중씨 당선)과 2007년 대선과의 차이점을 보면 재미있는게
1997년 imf당시에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씨는 38%나 득표했습니다. 표수로만 따지면 980만표정도 약 1천만표입니다.
2007년 민주당 후보인 정동영씨는 26% 표수로 따지면 6백10만표 득표했습니다.
이 차이가 1천만표와 6백10만표.. 이 차이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거라고 보십니까?
1997년 한나라당은 경제를 말아먹었습니다. 2007년에 민주당도 역시 경제를 말아먹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근데 한나라당은 1천만표나 득표했고 민주당은 700만표도 못넘겼습니다.
경제를 말아먹은 한나라당에게 1천만표를 던지고 민주당에게 700만표를 던진 사람들은 왜 표를 던졌을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지역]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역주의의 투표는 그 지지를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한나라당이 imf를 가져왔어도 한나라당만 찍은것은 지역주의의 표입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에요. 지역표는 함부로 지지를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물론 민주당은 그렇게 경제를 말아먹지도 않았지만요. 그건 여기서 따지면 글이 넘 길어져효)
문제는 그 지역주의 성향의 표들이 엄청나게 격차가 나고 특히 한나라당에 많이 쏠려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경상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경상도에서 한나라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살펴본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지지층이 거의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경상도내에서 한나라당에게 표를 던지는 인구수만 약 400만에서 500만입니다. 사실 2007년 대선에서는 적게 뽑은겁니다. 왜냐? 이명박이 bb0 의혹때문에 경상도 내에서도 사기꾼으로 의심받았거든요.
(실제로 이런 이유로 이회창씨 찍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나오면 400만표 이상 던질겁니다. 왜냐면 이명박보다는 박근혜가 표를 던지기엔 좀 더 마음이 가볍겠지요.
(아마도 경상도의 인구감소와 투표율 하락때문에 400만표 턱걸이할수도 있군요. 그대신 수도권의 득표율이 높아지겠지요. 경상도에서 수도권으로 옮기는것 뿐이니)
근데 경상도에만 경상도 사람들이 사느냐? 아니지요.
수도권에도 많습니다. 수도권에만 약 20%이상 있을겁니다. 그 표수만해도 몇백만입니다.
그걸 다 합치면.. 경상도 출신으로 무조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는 수만 약 700만정도 됩니다. 네네네네네.. 순수 경상도 출신들의 표만 700만 정도로 전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표를 던지고 그리고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개념없으신 다른 지역분들(역시 imf때에도 한나라당을 지지하신 용자님들이십니다)이 합쳐지면 1천만표이상 만들어집니다.
그럼 대통령 당선에 필요한 1천1백만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라도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면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봤듯이 전라도내에서 200만 그리고 수도권내의 전라도 사람들 다 합치고 다른 지역 전부 다 합쳐도 민주당 지지표 700만을 못만듭니다.
지난 대선에서 겨우 6백10만표 얻었습니다.
하지만 경상도는 경상도 사람들만으로도 700만을 가뿐히 만듭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한나라당이 아무리 정치를 못하고 아니 정치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말아먹고 나라를 거덜내도 독도를 일본에 팔아먹어도.. 아니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는다해도..
경상도에서 무조건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기에 한나라당은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에 한나라당이 점점 망쳐지는 것입니다.
한나라당 자체가 정상적인 정당이 아니지만 저렇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기에 국민을 X도 아니게 보는 것입니다.
왜냐? X도 아니게 봐도 자기네들이 버림받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거든요. ㅎㅎㅎ 님들은 X도 아닌 인간들입니다. 한나라당에게는 말이지요..
민주당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에게 버림받을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버림받았지요.
하지만 한나라당은 절대 경상도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는다는걸 잘 알기에 개판인 것이지요.

이럼 또
"경상도 때문이 아니라 조중동 때문이다. 경상도에서 조중동을 많이 봐서 그렇다" 라고 하시겠지요.
웃기지 말라 그러세효~~
경상도에서는 조중동따위 안봅니다. 경상도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은 [부산일보]입니다. 부산일보는 부산 경남 내의 중도적인 신문(한국일보 정도)입니다.
조중동을 많이 보는것은 수도권이지 실제로 경상도에서는 조중동 잘 안봅니다. 지국 찾기도 힘듭니다. 한번 지역별 조중동 구독률 살펴보세요. 경상도는 수도권보다 훨씬 낮을겁니다.

조중동때문에 경상도가 저렇게 된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경상도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경상도의 생각(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을 그대로 조중동이 받아서 쓴다] 이게 오히려 더 맞는 말입니다.
왜냐? 조중동은 잘 알거든요.
한국의 정치를 결정하는건 당연히 선거입니다. 촛불시위가 아닙니다.
선거에서 가장 유리한 정당은? 한나라당입니다. 왜냐?
한나라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경상도가 가장 인구가 많고 그렇기에 정권창출에 가장 유리합니다.
그렇기에 경상도의 입맞에 맞는 기사를 써대는 것입니다.
조중동이 "좌X~" "빨X이" "전교조" "전라도" 어쩌고 부리는것들 그거 다 경상도에서 유래한겁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걸 그대로 써주시는 겁니다.
경상도에서는 조중동에 나오는 말보다 더 심한말도 서슴치않고 말합니다.다만 경상도인들끼리만 그러지요. (저도 애석하게도 그쪽 지역 사람이라서 그런 듣지 말아야 하는 소리를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조중동만 때려잡으면 한국정치가 제대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조중동의 배후는 경상도입니다. 한나라당이 아닙니다.
경상도가 자신의 투표성향과 정치성향을 바꾸지 않는한 조중동은 영원할 것입니다.
왜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쪽에 붙는게 가장 유리하거든요.

이런 상황이기에 조중동은 언제나 정치에 대한 혐오를 조장합니다.
정치는 더러운것이고 누구를 뽑으나 다 똑같다~ 라는 식의 기사를 냅니다.
왜냐? 지역적인 성향의 표들은 절대 그 지지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기사가 나오던간에 상관없이 특정당만 뽑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정치를 혐오할수록 경상도가 지지하는 한나라당에게 유리합니다.
조중동은 그걸 잘 알아요. 경상도의 지지성향을 잘 알기에 계속 정치를 혐오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상도인들이 imf를 몰고온 한나라당을 또 지지하는것을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다 똑같으니까 imf를 몰고온 정당을 또 뽑아도 문제가 안되는겁니다.

물론 인구만 따지면 수도권의 인구가 가장 많지만 수도권은 균질한 집단이 아닙니다.
실제로 수도권에서의 투표성향을 분석해보면 한나라당 지지와 민주당 지지가 비슷하게 나옵니다. 김대중씨가 정치활동을 할때 2000년 전에는 민주당 지지가 좀 더 많았지만 2000년 이후에는 한나라당 지지가 좀 더 많습니다. 이건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김대중씨의 영향력때문입니다. 김대중씨가 활동할때 지지자들이 많았지요. 그렇기에 김대중씨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나서는 민주당 지지에 소극적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도권내의 경상도 인구의 증가입니다.
위에 언급한적 있지만 경상도의 경기가 90년대 이후부터 좋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인구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 인구가 과연 어디로 갈까요?

이렇듯 수도권 자체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거의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다른 지역들은 다 합쳐도 경상도의 인구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한나라당이 유리한 것입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나라당이 많은표를 차지할 것이고 그렇기에 박근혜씨가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입니다.
이유는 위에 길게 적었습니다.

이럼.. 또..
이명박이 경제를 살리지 못할 것이고 물가도 많이 오를것이고 서민들 살기 힘들어서 한나라당을 많이 떠날것이다. 쇠고기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느냐?
그리고 박근혜는 여자이고 보수적인 대구나 경상도에서 여자를 대통령으로 뽑을리없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낮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하나 다 반박해드릴수 있습니다만 글이 넘 길어집니다. 간단하게 반박하죠.
1997년 imf당시에도 한나라당 지지자들 특히 경상도는 이회창씨에게 38%이상 표를 줬고 사실 50%가까이 표를 줄수도 있었는데 이인제가 중간에 400만표를 깎아먹어서 겨우 38% 900만표 이상 득표했습니다.
다시 말하지요. 한국 정치는 무조건 지역! 입니다. 경제따위 중요하지않습니다. 여자냐? 아니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역?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리? 중요하지않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그딴거 안따집니다. 그딴거 따질려고 했으면 이미 1997년에 따졌겠죠.
아참 박근혜가 박정희 딸인것..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가도 당선될겁니다. 저 경상도 출신이거든요(본적은 경북 영천임) 누가 나가도 됩니다. 70원 몽준이가 나가도 역시 당선됩니다.
정동영씨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가도 당선됩니다. 이명박이 또 선거에 나가도 역시 당선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다시 대선에 나가도 역시 뽑아줍니다.
단 한사람 "김대중"씨만 아니면 됩니다. 그게 경상도의 정치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이 될거라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 많은 수가 경상도사람들인 그 사람들이 2012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아주면서 뭐라고 말할까요?
그네들이 뭐라고 변명하면서 박근혜를 대통령을 만들어줄까요?
그건 1997년을 살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1997년 imf전(imf는 11월에 시작)에도 경제상황은 나빴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씨와 한나라당 지지율은 10%대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서는 대선을 치루기 위해서 김영삼씨를 탈당시킵니다. 그리고 이회창씨 위주로 당을 개편하고 대선을 치룰려고 합니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10%대였지만 막상 대선의 지지율은 40%가까이.. 이회창씨가 병역비리가 터지기 전에는 최고 60%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선 직전에 imf가 터졌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한나라당을 공격합니다.
"너네들이 여당이었고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거 아니냐!" 라고 말이지요.

근데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뭐라고 변명했는지 아시는지요? 아마도 기억 못하시거나 변명하는걸 거의 못들으셨을겁니다. 왜냐면 경상도인이 아니면 듣기 힘든 얘기이거든요.
그네들도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자신들이 어처구니가 없었겠지만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imf가 온건 김영삼이 잘못해서도 있지만 김대중이 맨날 김영삼 하는짓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서 기아차도 제대로 처리 못하게 했고 김영삼이 실패하면 김대중에게 유리할것 같으니 나라가 망하건말건 김대중이 사사건건 방해해서 그렇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이없으시지요? 글 쓰는 저도 어이없지만 저런 얘기 경상도 내에서는 많이 했습니다.
저새끼들은(욕먹어도 싸요) 맨날 남 탓만 하는게 일입니다.
참고로 이때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은 국회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날치기도 가능했고 날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야당이 사사건건 딴지를 걸 수 있었다는 것인지.. 쩝..

자 그럼 2012년 박근혜를 뽑는 사람들은 뭐라고 변명할까요?
"이명박이 경제를 살릴려고 했는데 맨날 사상이 이상한 좌파와 노빠들이 촛불시위하고 대운하도 못하게 막고 이명박이 경제를 살리고 싶어도 좌파 빨X이 촛불X비들 그리고 전라도 애들이 맨날 데모하고 경찰 두들겨 패고 법도 안지키고 공권력에 개기고 길거리 막아서 장사 안되게 하고 부동산 폭락하고 이명박 망하라고 노래를 불러서 그렇다." 라고 변명하면서 당당하게 박근혜를 뽑을겁니다.
님들은 지금 인터넷상에서 좌파/빨X이 어쩌고 씨부리는 인간들을 알바라고 말씀하시지만요. 그네들 알바 아닙니다.
그네들의 60%이상은 경상도 출신입니다. 경상도 출신의 한나라당만 뽑는 사람들입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는 제가 위에서 적어드렸습니다.
경상도에서는 한나라당이 지금 현재 과반을 훨씬 넘는 다수당임에도 나중에 2012년 대선때 역시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남탓만 할겁니다. 좌파 빨X이 전라도 어쩌고 씨부리면서
여전히 자기네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고는..
사촌이 받은 푼돈 30억뿐 아니라, 이명박이 직접 수백억 아니 1천억 이상 돈을 받아 먹어도 경상도에서는 역시나 또 한나라당을 뽑을 것입니다.
그게 경상도의 정치 수준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몇천억씩 삥땅을 쳤지만 여전히 전두환과 노태우의 후예들을 뽑아주고 있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변명할겁니다.
"김대중은 전두환으로부터 30억이나 받지 않았느냐?" <=== 30억 받은건 죽일놈이고 각각 수천억 챙긴 전두환과 노태우는 잘못이 없어서 맨날 지지하지요.
"저기 전라도를 봐라~ 또 90%이상 뽑아줬지 않느냐? 무슨 공산주의 빨X이들이냐? 90% 지지를 하게.. 경상도는 아무런 잘못 없다!!"
그정도로 경상도 사람들은 무식하고 그래서 무섭습니다.

2012년 8월 9일 위대하신 휘트니 휴스턴님의 49번째 생일날 또다시 이 글을 올리도록 하지요. 이 글은 2012년을 위해서 미리 적어놓는 것입니다.
어쩜 이렇게 돈도 안되는 정치예언은 잘 맞추는지.. 차라리 주식이나 부동산을 잘 맞추면 이미 떼부자가 되어있을 것인디.. 안타깝습니다. ㅎㅎㅎ
아 근데 2012년 8월이면 아직 대선전인데 어떻게 맞췄는지 아닌지 아냐구요? 그거야 쉽져.. 이미 여론조사로는 박근혜가 다른 후보들보다 지지율이 훨씬 더 앞서나가 있을테니까요 ^^




사족
꼭 이런글쓰면
"그래서 대안이 뭐냐? 대안도 내놓지 못할거면서 백날 떠들어봐야 뭐하느냐?" 라고 정곡을 콕콕콕 찌르시는 분들이 있습니당
그래서 한마디만 하지요.
경상도 패권주의에서 두번째로 피해 많이본 김대중씨 5년간 대통령 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 패권주의에서 가장 피해 많이본 노무현씨 역시 5년간 대통령 했습니다.
노무현씨 화려하죠. 1992년 총선 낙선(부산 동구) 1995년 부산시장 선거 탈락 1996년 총선 낙선 2000년 총선 낙선(부산 강서을)
10년간 경상도 지역주의에 조낸 피해본 두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도 바뀐게 없습니다.
근데 10년간 두명의 절대 권력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저보고 해결책을 내 놓으라구요?
제가 신인줄 아십니까? 헐~~~~~~

이런글을 쓰는 이유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어도 당신들이 싸워야 하는 적의 실체가 뭔지 그걸 알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는겁니다.
4년뒤에 박근혜가 대선주자 중에서 가장 앞서나간다. 근데 4년동안 한나라당은 경제를 말아먹고 비리로 얼룩졌다!
근데 왜 박근혜가 인기가 있는 것인가? 이걸 여러가지고 분석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머리 나쁜 인간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 이딴 소리나 지껄이겠죠.
다시 말하지요. 한국 정치는 지역! 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지역에서 경상도의 인구는 다른 지역들 서울 경기를 제외한 충청도 전체 강원도 전체 전라도 전체 그리고 제주의 인구를 합친것보다 더 인구가 많고
그 많은 인구의 경상도 사람들이 뽑는 정당이 한나라당 밖에 없다는게 그게 바로 한국 정치의 핵심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이유도 다 설명할수 있지만 너무 글이 길어지니 생략하도록 하지요.
사실 위에 적은것 다 주석 달아서 세세하게 이유까지 다 설명할수 있는데 글 정말 길어질까봐 일일히 안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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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분들이 바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바뀝니다.

우리 젊은 세대가 바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바뀝니다.

5월 23일 노무현 전대통령님께서 전해주신 이 교훈, 절대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특별기고]사지로 내몬 ‘빨대 검찰’과 언론

(2)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2007년 12월28일, 당시 이명박 당선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노 전 대통령이 몸을 던진 지난 23일, 이 대통령은 긴급 비서관들에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전임자를 잘 모셔도 될 때가 왔다고 판단한 걸까? 이 사건을 보며 머릿속으로 고대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남긴 기록이 떠올랐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이집트의 왕 사메트니우스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 포로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캄비세스는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는 거리에 사메트니우스를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사메트니우스는 자신의 딸이 물동이를 인 하녀의 모습으로 제 앞을 지나는 것을 봐야 했다. 모든 이집트인이 이를 보고 슬퍼했지만 사메트니우스만은 눈을 땅에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로행렬에서 자신의 하인 가운데 하나를 보는 순간,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표했다.”

세세한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본 것은 수천년 묵은 이 고대의 관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정치하는 나라라서 그럴까?

임기를 마친 것은 패전이 되었고, 퇴임한 대통령은 포로 취급을 받았다. 포로가 된 대통령은 먼저 측근들이 줄줄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봐야 했다. 승자들은 그의 눈앞에 포박한 아내를 데려다 놓고 실실 웃으며 ‘자기를 구하려고 아내를 버리느냐’고 모욕을 퍼부었다. 법적으로 싸워보겠다던 그의 가냘픈 의지도 행렬 속에서 마침내 자기의 아들과 딸을 보는 순간 꺾이고 말았다.

촛불정국으로 현직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을 헤매고 전직 대통령의 인기가 날로 높아만 가고, 친노가 재결집한다는 소문이 떠돌던 지난해 여름. 수사는 연임을 앞둔 전 국세청장이 특별세무조사로 4개월 동안 태광실업을 털어 얻어낸 정보를 대통령에게 직보함으로써 시작됐다. 세무조사 앞에 붙은 ‘특별’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뜻을 갖는다. 검찰은 인원을 두 배로 늘려 전직 대통령 주변을 몇 달에 걸쳐 먼지 털듯이 털었다. 국정원에서는 때맞춰 억대의 시계 얘기를 흘렸다. 금속탐지기를 갖고 봉하마을로 쳐들어가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면 단숨에 할 일. 하지만 검찰은 그동안 이른바 ‘빨대’를 동원한 교묘한 언론 플레이만 해왔다. 검찰은 고슴도치인가? 온몸에 빨대를 꽂은 모양으로 내용물을 줄줄 흘리고 다녔다. 이를 보다 못한 누군가가 검찰청에 빨대 한 상자를 택배로 보내는 퍼포먼스를 했다. 고양이가 참새를 잡아놓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듯이, 수사를 끝내놓고 구속 카드와 불구속 카드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를 무려 한 달. 마침내 참혹한 사태가 벌어어자 이제 와서 낯 두껍게 “원래 불구속 기소하려고 했다”고 인간미를 자랑한다.

검찰-빨대-언론은 혐의를 사실로 확정했다.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판결은 법정 밖에서 내려졌다. 보도를 보니 “확실한 물증을 수사팀에서 확보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래서 주변을 괴롭히며 압박하고 들어가 강제로 자백을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검찰은 무리한 수사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를 해 검찰에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자. 그 경우 더 큰 문제가 남는다. 증거는 언론이 아니라 법정을 위한 것인데, 왜 언론 플레이로 전직 대통령을 망신주는 정치적 기동을 해야 했는가?

“미안해하지 말라.” 권양숙 여사를 향해 한 말인 것 같다. 가족이 돈을 받았어도, 어차피 도덕적 책임은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간다. 물론 도덕적 책임과 법적 책임은 엄연히 다르나, 평소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던 자신이 이제 와서 법과 도덕은 다르다며 변명을 하는 것 자체가 구차한 일. 그렇다고 변호를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일에 당신 개인만이 아니라 개혁세력 전체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변호하면 검찰의 올가미가 주변과 가족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옥죄여 들어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향에서조차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그 분은 몸을 날려 정치 없는 세상으로 날아가셨다. 이것을 ‘서거’가 아니라 ‘자살’이라 불러야 한단다. 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 불러야 한다.

커다란 슬픔과 뜨거운 분노로 그 분을 보낸다. “원망하지 말라.” 그래, 우리는 저들을 용서하자. 그러나 결코 잊지는 말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경향신문 2009-05-25 18:04:41 -

[한승원 기고] 노前대통령의 슬픈 승부수

매일경제 2009.05.24

본문 링크: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294472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새벽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의 삶을 푸른 허공에 던져 마감했다. 그가 금의환향한 마을 뒷산 부엉이바위 앞의 그 허공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답답하면 그곳에 올라 꿈을 키우며 바라보곤 한 푸른 허공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충격에 휩싸여 말을 잃었다. 그의 뇌물사건 폭로를 말하던 정적들까지도 충격에 휩싸인 채 옷깃을 여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떠나간 그를 애도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준엄한 성역이고, 침범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아성이다. 사실상,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어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서에서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삶과 죽음을 섞어 살기로 작정한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 던진 하나의 슬픈 승부수였다.

그의 한평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한 사람의 입지전적인 승부사였다. 가난 때문에 부산상고를 다닌 그는 사법고시에 승부를 걸었고, 판사로서 삶을 버린 다음에는 인권변호사로 승부를 걸었다.

삼당합당 하는 무리에 참여하면 누릴 수 있는 영달을 버리고 꼬마 민주당에 들어갔고, 출마하기만 하면 당선될 수 있는 종로구를 버리고, 바보스럽고 고집스럽게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부산 근처를 여행 중이던 나는 그의 선거사무소에 찾아가 여비를 쪼개 내놓았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는 아내와 함께 눈 어둡고 허리 굽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세 개의 표를 모아주었다.

그의 서민적인 털털함과 바보스러운 착함에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표들로 인해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직 수행 중에 정적들에게 받은 탄핵도 사실은 승부사인 그의 바보스러운 정면승부였고, 그 승부수는 결국 제3당인 열린우리당을 거대 여당으로 만들어놓는 역반응을 몰고 왔다.

그리고 이제 뇌물로 인한 형의 옥살이, 아들과 딸의 검찰소환, 아내의 재소환, 앞으로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 고통스러운 삶을 앞에 놓은 그는, 도덕적으로 사망선고받은 스스로를 허공에 던짐으로써 역사에 승부를 건 것이다.

나는 관공서의 구태의연한 권위를 허물어 놓은 것을 그의 첫째 공적으로 삼고, 남북 화해를 도모한 것을 둘째 공적으로 삼고, 국방자주권을 가져오려 한 것을 셋째 공적으로 삼고,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곳곳으로 행정관청들을 옮기려 한 것을 넷째 공적으로 삼는다.

어쨌거나, 그의 서거로 말미암아 지금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한쪽은 박연차의 태광실업 탈세와 이와 관련한 노 전 대통령의 사건을 수사하는 것을 즐기며 박수를 친 사람들이다. 다른 한쪽은 그 수사를, 전 대통령을 시정잡배처럼 희롱하다가 결국 감옥에 보내려는 정치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악과 분노에 휩싸인 채 봉화마을로 몰려들어 그동안 그를 궁지에 몰아 넣었던 사람들의 조문을 막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세상이 흉흉해질까 싶어 침통해 있고, 경찰은 촛불이 대대적으로 번질까 싶어 긴장하며 분향소 주위를 철통 경비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극단적으로 선택한 죽음 앞에서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 되고, 각자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너무 무책임하게 선정적으로 호들갑스러웠고, 수다스러웠고 남의 불행을 즐겼다. 자기 정파의 영달만을 위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지 않았고, 돈 앞에서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했고, 자기 자식들만 호의호식하게 하려는 탐욕과 허영에 인격과 양심을 팔았다.

부디 그의 극단적인 죽음이, 이 시대의 불행한 정치 행태에 하나의 굵은 획을 긋고, 밝고 맑고 깨끗하게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삼가 그분의 명복을 빈다.

[소설가 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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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17:34:03 입력, 최종수정 2009.05.24 19:06:38

노무현 자살이 아니다. 자결이다.

출처 카페 > Director's guli.. | 덤덤하게
원문 http://cafe.naver.com/2005dgk/1055

어제 이른 아침, 노무현이 자살했다. 낮에 무심코 인터넷을 켰다가 알게 된 소식에 가슴이 먹먹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듯했다. 진정 승부사이긴 승부사이다.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써 마지막 판돈을 걸고 뱃팅을 하다니...졌다 정말. 결과적으로 검찰과 이명박 정부는 완전히 엿을 먹었다. 하이에나 떼와 적군들에 휩싸인 우두머리가 홀로 말을 타고 나가 장렬히 화살 세례를 맞고 죽음으로써 (그것도 자살이다) 수세에 몰린 아군의 사기와 정당성을 드높이는 것 같다. (화랑 관창...잔다르크...가께 무샤...등의 이미지가 스쳐간다)

이 후폭풍은 이명박 정권의 발목을 끝까지 잡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정권은 어떤 식으로든 원죄를 진 것이며, 후세에 용서받기 힘들 것이다. 물론 노무현에게 허물이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절차를 지키며 법의 형평성을 유지하며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치 보복적인 검찰과 언론의 공세는 마녀 사냥을 방불케 했고, 진보세력을 포함한 국민 모두는 한 인간의 몰락을 지켜보며 손가락질 하거나 방관할 따름이었다. 이 사회는 민주화 세력의 실패에 대한 죄값을 뒤집어 쓸 희생양이 분명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태가 자존심 강한 한 개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아울러 연일 미친듯이 날 뛴 보수 언론들은 그것이 자신들과 절대 화해하지 않은 노무현에 대한 원한의 발로에서였다 한들 절대 정당화될 순 없을 것이다. 보수 언론 관계자 그 누구도 다친 사람, 죽은 사람은 없지만 노무현은 죽었기 때문이다.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지 않고 마치 용산 참사처럼 토끼몰이를 해서 결국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을 죽인 것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함으로써.

이 모든 게 마치 조선시대의 사화를 보는 듯하다. 주리를 트는 고문과 몽둥이 찜질, 참수 등만 없을 뿐이지 검찰은 의금부에 다름없다. 새로운 권력의 시녀인 이들은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신생 권력의 욕망을 등에 업고, 또한 자기 조직 스스로를 위한 사회적 권력을 ‘엄정함’이라는 명목으로 쟁취하기 위해 구정권 세력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했다. 그 과정에서 권력을 잃은 자의 주변 인물들, 가족들은 족족 끌려가 죄를 고하라고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법은 없으니 머지않아 이 세력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에 대한 구정권 수장의 마지막 카드는...다름아닌 스스로의 생을 끊는 자살!! 이런 스토리는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데 바로 우리들 눈 앞에서 오늘 아침 일어난 것이다. 최첨단 현대를 산다고 하지만 권력이란, 정치란, 인간이란 달라진 게 무엇이던가?

그의 자살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가족들이 당하는 것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아내와 자식들이 끌려가 문초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들이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 (물론 동료와 친구들도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만이, 이 모든 것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해결책임을 알고 대도박을 벌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수사는 허무한 종결 선언을 내면서 곧바로 끝나 버렸다. 노무현 한명을 노린 표적수사였음이 역설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한국 사회의 미개한 후진성과 비정함, 더러운 정치판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드러내준 퍼포먼스만으로도 노무현은 5년간 대통령 업무보다 더 큰 역할을 일거에 해냈으며 우리의 치부를 만천하에 까발리며 엄청난 충격파를 한국 사회에 던져주게 되었다. 그의 몇 가지 과오와 늘 구설수에 올랐던 (보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된) 직선적인 스타일도 모두 일거에 파묻힐 정도로 그 파장과 교훈은 거대하고 지속적일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암살이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케이스는 금세기 들어 정말 전대미문의 사건인 것이다. 그것이 순간적인 충동이었든 아니든, 그가 남긴 유서는 한 인간의 고통과 결단과 외로움을 보여줌으로써 정치니, 진보니, 보수니, 개혁이니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먼지처럼 같잖게 만든다. 그는 대통령 임기 도중 극심한 보수층의 저항 속에 다분히 우왕좌왕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자신 생의 가치를 실천한 ‘일관성’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비록 뒤늦게나마 허물이 있으면 솔직히 사죄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또한 자신의 한 몸뚱아리를 글자 그대로 내던져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나아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 땅의 민주 세력들까지 구하는 놀라운 반전을 일구어 냈다. 생각해보라.... 만약 노무현이 검찰과 현 정부의 계획대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다면 이 땅의 진보세력들은 어찌되었을까를. 그 자괴감과 치욕, 정체성 상실은 한국 현대사의 모든 값비싼 희생과 저항 정신을 일거에 날려버렸을 것이며, 그저 잘 살고 잘 먹게 해준다는 구호만으로 대통령에 뽑힌 전과 14범 기업인을 중심으로한 보수 세력들은 감동적인 천하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다. 현재 민주세력의 지리멸렬함으로 볼 때 결국 그들은 일본 자민당 마냥 대대손손 수십년간 집권하며 한국의 미래를 일방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어쩌면 북한과의 극단적인 갈등을 불러와 결국 우리는 머지않아 엄청난 민족 비극을 겪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제 새벽 노무현이 그러한 모든 것을 염두에 둔 채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진 않았겠지만, 그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생은 숨겨져 있던 클라이막스로 비로소 치달으며 그 일관성과 의미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노무현의 마지막은 분명 수치감과 실패에 좌절한 한 개인의 극단적 자기 파괴행위만은 결코 아닌 것이며,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자결’로 불러짐이 더 옳을 것이다.





- FTA 반대/스크린 쿼터 사수 투쟁 때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노무현 맹비난을 했던 정윤철 씀.

자신의 전임자의 서거로 당황한 한국 대통령

자신의 전임자의 서거로 당황한 한국 대통령
(Aujourd'hui la Corée / 마리 드크루아 / 2009-05-25)


Le président coréen embarassé par le suicide de son prédécesseur
le 25/5/2009 à 9h08 par Marie Decroix (Aujourd'hui la Corée)

C'est l'histoire d'une vieille haine. En 1997, Lee Myung Bak et Roh Moo-hyun se sont affrontés pour le siège de député de la circonscription de Jongno, dans le centre de Séoul. Lee Myung-Bak l'emporte au terme d'une campagne très difficile. Mais son élection est invalidée sur plainte de son adversaire, pour dépenses électorales excessives... Résultat, c'est Roh Moo-hyun qui obtient le siège de la circonscription la plus convoitée du pays. La haine entre les deux hommes est scellée.

이 것은 오래 묵은 원한의 역사이다. 1997년, 이명박과 노무현은 서울 한복판의 종로 선거구를 놓고 대결했다. 이명박이 아주 어렵게 승리했지만, 그의 당선은 선거비용의 과다지출에 대한 그의 반대파의 문제제기로 무효가 되었다. 결국, 이 나라에서 가장 탐나는 이 선거구의 국회의원 자리는 노무현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두 사람간의 증오가 싹튼 것이다.


Alors, lorsque Lee Myung Bak entre à la maison bleue, le siège de la présidence coréenne, pour remplacer Roh Moo-hyun, début 2008, le nouveau président a soif de vengeance.

이렇게 2008년초 노무현을 승계하면서 한국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 위해 이명박이 청와대에 입성한 순간, 이 신임 대통령은 복수의 갈증을 느꼈다.


Vengeance judiciaire, en lançant les procureurs aux trousses de Roh, dans une affaire de corruption présumée. La femme de l'ancien président aurait touché 1 millions de dollars d'un homme d'affaire. "Un prêt" affirme Roh. "Corruption" pensent les procureurs, qui lancent des mandats d'amener contre l'ancien président et tous ses proches. Son épouse devait être interrogée quelques heures après son suicide.

이렇게 부패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노무현을 압박하면서 사법적 복수극이 시작된 것이다. 전 영부인이 한 사업가로부터 백만불을 받은 것 같다. 이는 노씨에게는 대출이었고, 검찰에게는 부패였다. 그리고 검찰은 노 전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내는 원래 몇시간 뒤 소환 예정이었다.


Ce qui est frappant dans le traitement de cette affaire judiciaire, c'est l'absence totale de secret de l'instruction, l'ensemble des éléments fournis par le parquet se retrouvant dans les médias. et c'est l'attitude de ces médias, justement, reprenant sans nuance l'ensemble des informations fournies par les procureurs, faisant même des shows en direct des auditions des témoins, bref condamnant sans appel l'ancien président avant même qu'il puisse être entendu.

이번 부패사건의 검찰 수사에서 놀랄만한 점은 수사의 비밀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며, 검찰이 제공한 모든 수사내용이 언론에 그대로 공표되었다. 언론은 검찰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아무 비판없이 지면에 실었고, 마치 법정에서 피고인 심문을 생중계하듯 한 것이며, 여기서 피고인인 전직 대통령이 그 혐의 사실을 듣기도 전에 그를 단죄시 한 것이다. [ 역자주 -사실상의 언론 지면을 통한 재판이었지만, 검찰과 언론의 기소만 있지, 노무현의 변론은 없었던, 일방적 노무현 죽이기 였다고 생각된다.]


Roh Moo-hyun l'avait bien compris, lorsqu'il explique dans sa note son suicide. Il sait que ses proches vont tous être atteints, les uns après les autres, et que même si il a toujours nié la corruption, ses dénégations ne peuvent atténuer la honte qui s'étend sur sa famille.

그의 유서에서 노무현은 이를 고발했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들이 차례로 모두 피해를 당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그가 그의 부패혐의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의 혐의사실 부인이 그의 가족 전체에 대한 망신을 고조 시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Ces critiques sur la responsabilité du pouvoir dans la mort de l'ancien président, on ne les lit pas dans la presse coréenne. On ne les entend pas à la télévision.
Les médias sud-coréens sont ainsi tous contrôlés par les Chaebols, favorables à Lee Myung-Bak, lui même un ex de Hyundai. Il est frappant que depuis le suicide, toutes les télévisions se contente de diffuser les conférences de presse officielles de la police, des médecins, de la maison bleues. On n'entend jamais les Coréens qui par dizaines de milliers viennent lui rendre hommage dans son village, à 500 kilomètres de Séoul. A l'exception de MBC, seul média "rebelle" qui a explicitement évoqué la "revanche politique" à l'origine du drame.

전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권력의 책임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은 한국 신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텔레비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언론은 이명박을 지지하는 재벌의 통제하에 있고, 이명박은 재벌 현대그룹 출신이다. 노무현 서거이후, 모든 텔레비전들이 경찰,의사,청와대의 공식발표들만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서울에서 500km 떨어진 그의 고향마을에서 조문 중인 수십만의 한국인의 목소리는 언론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다. 투쟁 중인 미디어 문화방송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방송만이 이 드라마의 기원인 « 정치 보복 »을 명시적으로 상기시켜주고 있다.


Sur internet le ton est bien différent. On montre comment des milliers de policiers ont bloqué le centre de Séoul, à Jongno, pour empêcher les manifestations à la mémoire de Roh Myun-hyun, qui auraient pu se transformer en protestation contre le pouvoir.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네티즌들은 어떻게 수천명의 경찰들이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 종로에서 노무현을 추모하는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이곳을 봉쇄 중인지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On montre aussi comment le président du Parlement coréen, fidèle de Lee, a été empêché de voir le corps de Roh par la foule en colère.

네티즌들은 또한 이씨에게 충성하는 한국의 국회의장이 분노한 시민들이 노무현을 추모하는 것을 어떻게 방해했는지 잘 제시하고 있다.


Quelques heures après la mort de l'ancien président, le procureur de Séoul a annoncé la fin de toute investigation sur la corruption présumée de sa famille.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뒤 몇시간 후에, 서울의 검찰은 그의 가족의 부패혐의에 대한 모든 수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출처 : http://www.aujourdhuilacoree.com/actualites-coree-le-president-coreen-embarasse-par-le-suicide-de-son-predecesseur-1594.asp?1=1

위기의 종말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28&articleId=22947&hisBbsId=total&pageIndex=1&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선거로 집권했으니 독재정부가 아니라고?

원문: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691786&pageIndex=1&searchKey=daumname&searchValue=케네디언&sortKey=depth&limitDate=0&agree=F



- 케네디언, 09.06.13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 정부를 과거 독재정권에 비유하며 강력히 비판한데 대해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선거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정권을 어떻게 독재정권이라고 비판하느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 반박을 듣자마자 코웃음이 나왔다. 과거 한나라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숱하게 '독재정권'이나 '빨갱이 정권'이라고 공격한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권이 아니었나. 더구나 지금까지 역사는 선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독재정권이나 독재에 준하는 정권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나치 히틀러도 사실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고, 페루의 일본계 후지모리 대통령도 합법적 선거를 통해 권위주의식 집권했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사실상 방송을 통제하고 기득권세력에 특혜를 주는 부패정권의 대명사가 됐다.










사실 필자는 2007년 대선 결과에 대해 “배가 고프다고 쓰레기통을 뒤진 격”이라고 통탄한 적이 있다. 자산과 소득 양극화에 부동산값 폭등, 비정규직 비율 55%, 청년 실업 200만, 출산율 바닥, 자살율과 근로시간, 산재사고 OECD 최고라는 대한민국의 엽기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 현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됐다. 솔직히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화된 형태로 말이다. 사실 현 정부는 아마추어도 이만저만한 아마추어가 아니며,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는 점에서 사기꾼 기질이 유전자에 각인된 정부라고 본다. 이들을 단순히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실용정부’나 중도 우파 정부라고 본다면 그것은 오해요, 착각이다.










이들은 과격한 ‘우파 기득권 혁명세력’이다. 물론 지금 같은 경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엉터리 저질 집단이기는 한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들과 지지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관철시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집단이라는 점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자신들 세력을 결집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선전포고하고, 미네르바 등 네티즌 논객을 구속하고 용산참화의 희생자들에게 사과는커녕 물리력을 휘두르고, 서울광장까지 봉쇄하며 시민들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를 가로막는 태도를 보면서 이들은 정상적 판단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대폭로(The Great Unraveling)'이라는 책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를 ‘혁명 세력(A Revolutionary Power)’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처음에 경제 문제에 대해 글을 쓰다가 점점 정치 문제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급진적인 정치 운동이 부상하고 점증하는 지배력을 갖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급진 우익이 백악관과 의회를 사실상 지배하고, 사법부와 미디어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게 된 현실에 대해 그는 매우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그는 이 같은 생각을 바로 이 책의 도입부에서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닉슨 행정부 시절 냉혈적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박사학위 논문 ‘되찾은 세계(A World Restored)’에서 1930년대의 전체주의 정권들에 대한 유화적 대응책의 실패를 비판한다. 이때 그는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 치하의 정치 세력들을 ‘혁명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1930년대의 전체주의 세력에도 같은 규정을 한다.













폴 크루그먼은 헨리 키신저의 이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부시 행정부 또한 기존 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혁명 세력’이라고 규정한다. 이들 혁명 세력들은 오랫동안 확립된 미국의 정치 및 사회적 제도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우리들 모두가 당연시하는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부의 역할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확충 등을 단순히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기본적인 (시장경제) 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력 사용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에 테러를 가한 적이 없는 이라크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 대표적이며, 시리아, 이란, 북한 등도 ‘악의 축’으로 묶어 같은 방식으로 다루려 했다. 미국 헌법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던 정교 분리를 내팽개치고 ‘성경적 세계관’을 확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정통성은 민주적 절차에서 나온다는 사상을 받아들이는지도 의심스럽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 나라를 이끌도록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하면, 이들 혁명세력이 원하는 나라는 이렇다.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없으며, 국가의 뜻을 해외에 관철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며, 학교에서 진화를 가르치지 말고 종교를 가르쳐야 하고, 선거는 형식적 치장물에 불고한 나라’ 말이다.













폴 크루그먼은 감세와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어, 이들 혁명세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지 설명한다. 우선, 감세는 90년대부터 공화당의 핵심 의제였다. 이들 혁명 세력들은 단순히 감세를 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미국 조세체계의 분쇄를 목표로 했다. 이들은 제한된 승리에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세수 초과 환급을 명목으로 세금을 깎고, 세수 부족으로 전환됐을 때는 경기 부양책으로 세금을 깎고, 경기 부양 효과가 없음이 드러나자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깎았다. 이라크 선제 공격론도 90년대초부터 폴 울포위츠, 딕 체니 등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강화돼 왔다. 따라서 그것은 9.11테러라는 당면한 상황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계 혐의로 이라크를 침공했다가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핵개발 프로그램(이후 ‘대량 살상 무기’라는 표현으로 확장하지만)을 이유로 갖다 붙였다. 나중에 이것조차도 설득력이 없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확산’을 명분으로 끌어댔다. 감세나 이라크전뿐만 아니라 에너지 정책과 환경 정책, 보건정책, 교육정책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든 경우에 부시 행정부는 그다지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책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온건주의자들을 안심하게 했다. 그리고 매번 온건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히틀러에 대해 영국 수상 리처드 챔벌린이 구사했던 식의) 유화주의 전략을 따랐다. 폴 크루그먼은 헨리 키신저의 통찰이 옳았다며 그의 말을 인용한다. “안정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혁명세력을 맞닥뜨렸을 때 당시 발생하는 것을 어지간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세력을 저지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제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한국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말로는 중저소득층을 위한 것이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부유층을 위한 감세정책, 시장친화적인 부유세의 하나인 종부세의 유명무실화, 반공 기독교이념에 사로잡힌 철저한 대북 대결 구도 전개(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주인처럼 떠받드는 미국으로부터 왕따당하는 얼간이들이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대통령과 소망교회 출신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강부자/고소영 내각’, 녹색성장을 외치면서 원전 대규모 건설 계획을 밝히고 4대강 사업과 경인운하 등 대규모 토건사업을 펼치며 환경영향평가는 요식행위로 전락시키는 반환경정부, 공교육을 사교육화하고, 사교육시장을 극대화해서 어린 학생들을 더욱 치열한 적자생존의 경쟁에 내모는 교육정책, 미분양 물량 매입과 건설 물량 퍼주기로 ‘건설업자 복지’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기존의 복지 예산은 삭감하는 거꾸로 정책, 전 세계가 부동산 거품 붕괴 충격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전매제한과 양도세 감면, 재건축 규제 완화 등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정부, 금융 재규제를 논의하는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로 금산분리 완화 추진, 공익 증진이 아니라 재벌 사업거리 확대를 위한 공기업 민영화 추진, 민주화 이후 진전돼온 천부인권적, 민주적 권리 및 제도 뒤집기 정책-군의문사위 해체, 국가인권위 조직 축소, 집단 소송제와 서울광장 봉쇄 등을 통한 집회결사의 자유 및 인터넷 명예훼손죄 도입 시도 등으로 표현의 자유 제한, 권위주의 정권식 방송 통제 및 낙하산 인사 파견, ‘건국 60년’ 표현을 통한 헌법에 규정된 임시정부 정통성 부인과 뉴라이트 등 친일우파 집단의 득세, 친일우파적 시각에서 역사 교과서 수정 시도 등등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게 불과 이들이 집권한지 1년 반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한 마디로 합법적 권력을 배경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를 끈질기게 저지르는 사악한 패악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당초 목표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그러면서도 철저히 추구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사실 현 정부는 부시행정부와 같은 ‘우파 혁명세력’ 정도로 끝나는 정권이 아니다. 아예 시장원리를 깡그리 무시하며 기득권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정권이다. 현재 한국 국민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최악의 저질 불량정부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여타 다른 상황도 미국에 비해 훨씬 더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거의 대다수가 민주당이나 무당파 성향으로 서민층 복지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반면, 한국의 엘리트들은 대부분 우익 성향에 자신들의 복지만을 열렬히 옹호한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제대로 된 신문들이고 저질 언론인 폭스뉴스 등은 주류라고 보기 어렵지만, 한국에서는 거대 기득권 신문들이 가장 영향력 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현 정부의 힘을 등에 업고 방송에까지 진출하려 하고 있다. 부시행정부 당시 미국에는 민주당이라는 매우 오래된 강력한 야당이 있었으나, 지금 한국에는 존재감과 정체성이 희미한 민주당과 소수 정당밖에 없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 정부는 부시 행정부보다 훨씬 더 엉터리여서 대중들이 그들의 진정한 속내를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 더구나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조중동 등 주류 신문들의 거짓말이 들통 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반면 20, 30대 젊은 세대들을 주축으로 인터넷상의 집단지성을 통해 진실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지금의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같은 정치세력들에서 희망을 보지도 않는다. 지금의 시대착오적 이념에 빠져 있는 엉터리 급진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서민들을 착취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분노할 뿐이다. 그리고 기득권 중심의 불공정한 게임 규칙이 적용되는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폴 크루그먼이 책에서 인용한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부시 행정부 당시 CBS의 60분 진행자인 앤디 루니의 말이다. “단 하나의 진정으로 좋은 뉴스는 미국역사에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는 것”이라고. 필자는 이 말에 조금 살을 덧붙이고자 한다. “단 하나 진정으로 좋은 뉴스는 한국 역사에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는 것, 그리고 정말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할 역량이 있는 정치세력이 성장해 집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모든 사람이 땀흘린만큼 제대로 대접받는 건전한 민주주의 시장경제 건설을 위한 좀더 의미 있는 토론과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을 방문해주십시오

[IGX]읽어볼만한 경제 브리핑

원문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695616

<드디어 시작했네요>, iGX, 09.06.16





안녕하세요. 현재 서울에 살고 있으며 대학을 중퇴 후 현재 백수인 30대 초반의
대한민국의 별볼일 없는 젊은이 입니다.

요새 더워지는 날씨에 다들 잘 계시는지요.

뭐 저는 제 자신이 그렇게 까지 비참한(?) 인생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만
어쨌건 외관 스펙상 제가 제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88만원 짜리네요 ㅋ.
따라서 앞으로 제가 쓰게 될 글들은 그냥 코웃음 치면서 읽고 넘어가셔도
무방하시겠습니다.





우선 아는건 개뿔도 없지만 대충 제가 생각하는 바를 좀 얘기해 볼까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잖아요ㅋ -_-; 읽고 틀렸다 싶으신 부분은 지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우선 현재 주식 장세는 유동성 장세라고 하죠.
쉽게 말해서 일명 '돈빨'입니다.

고객 예탁금은 하루가 다르게 빠지고 있고,
그래도 아직 현재 남은 예탁금 수준은 작년 지수 2000천 고점과
많이 다르지 않은 상황인데 정작, 지수는 1400선에서 힘겹게 공방중입니다.

이는 곧, 지금은 주식에 들어갈때가 아니라는 뜻이죠.

기관은 겉으로는 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루도 쉬지 않고
현물을 팔아대고 있고,
외국인이 주식을 사고 있다고는 하지만 ETF 포함한
외국인 포지션을 살펴보면 외국인 또한 주식을
줄기차게 갖다 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상황은 결국 대하락의 정점에서 점점 개미들만 남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외국인이 어제부터 대놓고 팔기 시작했네요. 연기금이 받쳤다고는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기관들 죄다 팔았습니다.



이제 대한 민국 주가는 신나게 가는(?) 일만 남았네요.

어디로 냐구요? 지하 벙커로 가야죠.

아마 거기엔 우리의 신 이메가님께서 우릴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요새 언론이나 특히 증권사 브리핑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진짜 나쁜 쉑히들

개미들 뼛골까지 빨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주식 투자를 해야 될 때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3분기되면 기업 실적이 좋아질꺼라면서.

이런 개...(죄송합니다 -_- 요새 애널리포트만 보면 욕부터 나와서요.)



주식은 선행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다고 칩시다.
이 컴퓨터가 '5년후에 삼성 주식이 5백만원이 될 것입니다.' 라고
정확히 예견했다면,
삼성 주식은 바로 다음 날 5백만원이 될 겁니다.



따라서 3분기 어닝 시즌에 어닝 서프라이즈가 어쩌고 저쩌고...

실적이 제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현재 주가에 이는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3분기에 제 아무리 실적이 좋게 나온들 주가가
폭발적으로 가긴 힘들다고 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고꾸라질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진짜로 기관애들 욕나올수 밖에 없는 이유가

목표치 상향 조정해 놓은 리포트 속속 내놓고 주가떨어지면 저가매수기회가 어쩌네 저쩌네...

(그러면서 지들은 왜 파는건데? 아무리 지들이 관리하는 예탁금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러면 대놓고 주가떨어질테니 사지 마세요. 이딴 소리는 못할망정, 사세요! 사세요!

더 갈 수 있습니다. 이딴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닙니까. 차라리 입다물면 양심적이라는 소리라도 듣지.

진짜 겉다르고 속다른 쇼키들 입니다.)



꼴에 암것도 배운 것도 없이 별 학력도 없는 제 눈에도

왜 주가는 필연적으로 왕창 맛갈 수 밖에 없다고 보일까요?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3분기를 지나면서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비스수지(-), 소득수지(-), 경상이전 수지(-), 수입...
죄다 적자를 내는 요인들만 득시글 한 상황에서 수출 감소 폭보다
수입 감소폭이 더 커서 현재 그나마 흑자를 내고 있는데

한국 은행 발표에따르면 선방하던 수출 감소폭이 앞으로
더 커질것이라고 합니다.



(뭐 당연한 얘기죠. 소비국이 죽었으니. 미국을 대체하는 소비국으로
중국이 거론되고있지만, 지금 현 상황에선 절대 중국이 우리나라 제품을
미국보다 더 많이 사주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수출이 호전될지, 악화될지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답 나온거죠. 한국 생산자 물가지수가 마이너스인것도 쉽게 생각해서
아직도 우리 상황은 경제 상황상 과잉공급이거나 기업들이 물건 만들 생각을
안한다는 겁니다. 미국 소비자지표가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69...
아직 멀었죠. 기저효과를 무시한채 발표되는 수많은 회복 지표에
속으면 안된다는게 제 같잖은 견해입니다. --;; )



게다가 환율과 더불어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인
WTI 원유 가격이 상승하고 있죠.

배럴당 75불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경상수지는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엊그제 70불. 두바이유도 오름세로 돌아선지 한참 되었습니다.
이제 딱 5불정도 남았네요.



그렇다고 지금 경기 하락을 전제로 지금 환투기

(혹은 투자 = 통화 리스크에 따른 분배 자산 투자를 꼭 나쁘게 보진 않습니다만 지금은 환율을 가지고

자산을 운용하시는 것은 투기입니다. 왜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하실려고 미국 달러 사신 분들이 간혹 보이는데요.

지금 환율로 인한 재테크는 매우 위험합니다. 간단합니다. 달러가 미친 듯이 풀렸기 때문이죠.

예전처럼 우리나라 경기 하락 = 환율 상승의 공식이 백프로 적용되기가 힘든 상황이란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한은도 금리를 올리겠다고 합니다. 미국 금리 올릴때 우리 금리 안올리면

안그래도 맛갈 경제 아마 일주일도 안되서 쭈~욱 뻗어버릴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때되면 환율 상승에 대한 배팅은 미국이 달러를 더 많이 쪽 빨아들이드냐 우리 나라가 원화를 더 많이 쪽 빨아들이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가와 환율의 비대칭 공식이 성립 할 수도 성립 안 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환율도 돈을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는데 왜 투자하는게 잘못된거냐?

굉장히 위험하단 얘기죠. 알 수 없는 싸움입니다. 돈은 원칙적으로 리스크를 헷징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볼 때

대규모 투기 자본이 아니고서야 지금 개미가 환율 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잃어도 상관없는' 돈이 아니라면

위험한 투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몰빵을 좋아하시죠. 한 순간에 갑니다.

당연, 주가는 환율관 상관없이 맛이 가고 있겠군요. 만약 환투기에 돈이 묶이지 않으셨다면 주가가 바닥을 칠 때 들어가신다면

더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 환투기하지 마세요. 설혹 환투기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 옆에 보여도

눈길조차 주지마세요. 운빨 입니다.

나중에 원자재 펀드(원유 곡물, 특히 옥수수 중심), 주식 투자해서 수익률 역전해 드리면 되는겁니다.



덧붙여, 현재 한국 경제가 펀더멘털 기조가 튼튼하고 세계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동네 뻥튀기 아저씨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초고단수 '뻥이요!' 기사들에 관해서...



세계 무역의 현주소를 대충 가늠해 볼 수 있는

건화물 운임지수인 BDI 지수가 요새 상승하고 있다고들 하죠.

하나 이는 쉽게 말해서 중국이 그동안 원자재를 '사재기'하느라 오른겁니다.
(BDI 원자재, 중간재를 싣고 나르는 선박들 지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증가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무역이 살아나서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중국이 원자재 사재기를 끝내자 요 며칠새
이 지수는 고꾸라지고 있습니다.
완성품을 수출하는 선진국형 지수를 뜻하는 HR 지수가 BDI 지수와
더불어 동반상승하지 않았음이 그 근거입니다.

선진국은 죽어나가고 있단 얘기죠.



게다가, 전 세계가 굶어 죽겠는 마당에서 국가들이 지네들
보호무역을 강화했으면 강화했지
(미국만해도 며칠 전 바이 아메리카 조항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전 세계 무역이 살아나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회복세가 감지되고
있다는 장밋빛 뉴스들은 사실관 맞지 않다는 거죠.
제가 한참 부족해서 잘못 판단하는 것일수 있습니다만,
여튼 저는 그렇게 봅니다.



게다가 보너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재정적자가 심화되어
세출을 줄인다는 뉴스가 오늘자로 떴습니다.
쉽게 말해서 경제 부양을 위해 장전해둔 총알이 이제 다 떨어졌다는 거죠.
이는 곧 세입을 늘이겠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서민들한테 불리한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더 걷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다고 합니다.

윤 재경부 장관께서 재정확장 기조를 계속하시겠다고 하시던데 도대체 어디서 돈이나서

이런 정책이 계속될지 많이 우려됩니다.



게다가 미국 연준이 금리를 올릴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분명 한은총재까지 선진국(미국이겠죠)이
금리를 올리면 우리도 금리인상을 따라가겠다고 말씀하셨던게 기억나네요.



현재 상황에서 금리가 올라간다면 백프로 스태그플레이션입니다.



부동산 버블 꺼지는건 한 순간이겠죠.

단타로 현재 시중에 도는 자금이 서로 재건축(주식으로 치자면 일명 초단타)
쪽에서 폭탄돌리기를 하는 마당에


오늘 재건축값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기사 또한 떴습니다.



진짜 지금은 위험한 꼭지라는 소립니다.



(1929년도 미국 대공황때도 진짜 대공황이 오기전에 반짝 상승이 있었다가
롤러코스터같은 직하강이 있었다는걸 잊으시면 안되겠습니다.

그 때도 정확히 주가가 고점대비 딱 절반을 회복하고 미친듯이 고꾸라 졌습니다. 절반에서 다시 6/5이 빠졌죠.

고점찍고- 반 회복하고 - 다시 1/6 로 급하강. 그 때 절반 회복했을때의 분위기는 현재 지금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했다고 합니다.

경제다 다시 살아난다, 경기 저점을 찍었다, 펀더먼털의 회복, 이 따구 얘기가 전 신문을 도배했다 이거죠. 그러고 정확하게

다우 지수는 300포인트에서 44포인트까지 별 반등도 주지 않고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제조업이 살아나지 않았는데

금융 버블이나 돈 발르기로 경제는 절대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지금이 딱 돈 발르고 경제 살아난다고 다들 눈 반짝이며

기다리는 상황이죠. 지금 전 세계 , 특히 우리 나라는 정확히 벼랑을 향해 발 하나를 내딛었습니다.

그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고 믿어 마지 않으면서 말이죠.)



국가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기준 금리마저 올라가기 시작하면 경기,
특히 주가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은 진짜 불을 보듯 뻔한 일.

(엠파이어 스테이트 제조업 지수때문에 미국 다우지수는 급락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재앙의 전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확실한건 "이제 곧 시작한다." 입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금융가지고 잘먹고 살았으면서

어떻게 제조업 지수를 기대한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애널들은 제조업 지수 향상에 기대를

걸었다고 하죠. 외계인이나 국내 기관이나 개찐 도찐인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가가 더 간다고 그래도 수많은 악재에
뒷머리채를 휘어잡힌채 뛰는 주가가 가면 얼마나 더 가겠습니까.



다시 주가가 재차 커다란 재하락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미국 오바마 정권의
미국 50주 고속도로 대 건설과 궤적을 같이하는



4대강(갠적으로는 결국 대운하가 될 것으로 봅니다만)으로 대표되는,
금융허브, U-city 등등의 건설 산업이 경기 회복을 주도하면서
경기 침체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성공 가부는 원자재, 특히 석유 가격과 앞서 말씀드린 환율이 관건이 되겠네요.)



이 때가 진짜 주식을 살 때죠. 만약, 이때 이메가 정부가 복지 예산을 줄이고

대기업 중심(쉽게 말해 부자만세 정책)의 경제 주도 전략을 세웠다면

향후 5년~10년정도 안에 부자 대열에 끼지 못하면 삶이 비참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대통령때 현재 정권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사뭇 궁금하네요.



하지만, 진짜 경제가 바닥을 쳤을때 현 정권이 복지 정책에 힘을 쏟고 제조업과

우리 나라의 석유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짜 말로만 녹색성장이 아닌

진짜 녹색 성장과 중산층 형성, 소득 재분배에 기여한 튼실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다면

아마 집권말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져 있을 겁니다.



다만...4대강 관련 편성된 예산을 보면... 뭐라 더 얘기하기가 힘드네요.

오늘자 신문에 세수 증대를 위해 간접세(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세금냄.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불리한 세금)를

늘리고 복지 예산을 줄일꺼라는 기사를 보고, 또 녹색성장을 외치지만 건설업에 승부를 띄우는 듯한 현 정권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퇴보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경제 말살의 시대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듭니다.



부자가 많으면 투자만 늡니다. 부자들이 절대적인 소비만 많지, 그들의 소득대비 소비는 절대 많지 않습니다.

이는 곧 공급 과잉으로 이어지고 현 정권 방향대로 다시 경기가 회복되어 경기 호황을 맞게 된다면

그 후의 대공황의 규모는 뭐...어떻게 표현이 안되네요. 지금이 대공황의 전초전인데...



요는,



지금 진짜 주식 들어갈 생각이 있으시면 접으시고,
들어가셨으면 빨리 발을 손절하고 나오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투자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스스로가 직접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만큼

제 같잖은 의견은 참고만 하십쇼.

서른살이 넘도록 인생 88만원짜리 대학도 못나온 백수가 뭘 알겠습니까.



계속해서...

기업 실적에 관해 더 얘기해 보자면,

증권사들의 3분기 기업 실적이 좋아질 거라는 전망(?, 도대체 뭘 가지고 전망한다는건지.)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경기에 일반 서민보다 더욱 민감한
기업들은 이미 더 빨리 알고 있습니다.
일례로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계속 줄어들고 있고
회복할 기미는 커녕 그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기업이 사내에 쌓아두는 현금 사내유보율 또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죠.
대한 민국에서 부채비율 좀 적으면서 우량한 재무구조를 가지는 기업들
재무제표 몇 개만 들여다봐도 금방 답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경기 침체 때 살아 남아보겠다는 겁니다.

바닥 찍고 반등시까지만 살아 남으면 새로 열릴 신세계의 달콤한 과실은 죄다 지들꺼라 이거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상 당연한 얘기입니다.

(갠적으로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 도덕성을 묻는건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건

국회의원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을 조져야죠. 하지만 친일파 미청산, 혼맥으로 얽혀진 정경 유착이

어느 나라보다 견고한 모국가 - 어디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요샌 툭만하면 잡혀가니까 --; - 에서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 힘없는 개미들이 할 수 있는 건 진짜 엿같지만 국가가 잘해주면 정말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네 큰손들 따라서 부를 열심히 축적하여 그들의 파이를 나눠먹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같이 힘을 길러서 씨부려야지, 힘도 없이 씨부리면 또 무시당합니다. 참, 서글픈 얘기죠. 젠장.)



중간에 글이 또 멋대로 흘렀습니다만,
경기가 바닥을 찍었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들...


이런 웃긴 글들을 보면서 답답했던 제 마음을 달래보고자 자기 기분에 취해 글쓰면서 좀 흥분한
감이 없잖아 있네요. 원래는 이런 글 길게 남길 의도가 아녔는데 말이죠. --;;



여튼, 결국 우리 경제가 바닥을 찍고 한반도 전면전이란 최악수만 없이
마거릿 대처와 레이거 노믹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경제 살리기가 시작되면...



(쉽게 말해서 삽푸기 운동으로 시작되는 경제 재건입니다.)



그 땐 진짜 열심히 돈 벌어야 됩니다.

일도 열심히하고, 투기도(응?) 열심히 해서....제기랄. ㅠㅠ



(정말 좋은 세상 좀 왔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왜 우리는 스웨덴, 노르웨이처럼 안됩니까.)



새 시대의 대한민국은 국민간 빈부격차가 넘사벽을 이루는
세상이 될지 중산층이 행복한 새 시대가 될지 역시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신자유주의 체제라면 생각만해도 답답하네요.)

저같은 서민한테는 진짜 먹고 사는게 정말 심각한 문젭니다. -_-


여튼 요는, 지금까지 같잖은 제 개똥 철학에서 비롯한 잡소리는 다 집어치우고.



지금 경제 좀 살아난다는 낚시(?)성 기사에 낚이지 말자. 입니다.

다들 성공하는 인생, 즐거운 투자, 행복한 부자되시길 바랍니다.



3~4년 후에 저도 부자되서 다시 글 올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는 진짜 천박한 졸부들 고기 파이 좀 뺏어보렵니다.

저는 뭐 스펙이나 태생이나, 여러보모 기본이 천민이라 돈 벌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려나요. ㅋ



긴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행복하십쇼!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큐브릭이 찍은 시카고

http://www.chicagotribune.com/news/custom/photos/gallery/chi-kubrick-photogallery,1,3753405.photogallery?coll=chi-news-hed&index=1

<미술로 보는 20세기>중 '사르트르와 자코메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또는 인간의 의식은 '무(無)'이다. '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존재 방식의 특수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의식은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대상으로 파악되는 순간, 의식이 아니다. 경험과 판단의 주체이지 객체가 아닌 까닭이다. 반면에 사르트르에게 '존재'라는 말은 의식 주체로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대상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다시 전자를 대자(對自), 후자를 즉자(卽自)라고 불렀다. 인간은 사과나 개, 건물 등의 사물처럼 경험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사과나 개, 건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존재, 그것 자체로서 충족된 존재다.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늘 결핍돼 있다는 뜻이다. 의식은 늘 무언가를 바란다. 인간은 이렇듯 결핍돼 있으면서 충족된 존재를 경험하고 지향한다. 나아가 신이 되기를 꿈꾼다. 신은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대자와 즉자로 구별될 때 어느 한쪽만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완전자(신)는 의식이며서 동시에 대상이어야 한다. 인간은 그 지점을 꿈꾼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비록 의식이 무언가를 늘 지향하지만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곧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먹고 싶은 저 사과는 맛있는 사과일지언정 그 자체가 동시에 나의 의식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은 다시 '무'가 된다.
이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위치를 자코메티는 <장 주네의 초상>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장 주네는 사르트르 못지 않게 자코메티와 가까웠던 실존주의 문인이다.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코메티는 모델의 눈동자 부근을 흐리게 처리해 마치 안구가 사라진 듯 묘사하는 한편 대머리를 강조해 해골의 인상을 강하게 살렸다. 앞서 소녀를 그리다가 그의 응시에서 실존을 발견했던 자코메티의 경험을 상기한다면, 모델을 포함해 모든 것을 동일한 색상으로 삭막하게 처리하고 인물의 눈동자만을 비운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응시'는 이 작품 전체의 주제다. 부러 육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일 수 없는 '시선=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표현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지금 관자(觀者)를 '실제로' 쳐다보는 살아있는 시선을 그리려 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 자체는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고 의식은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이 '육체의 사물성'을 고도로 강조해 역으로 '산의식'을 드러내 보이려 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듯 의식을 주제로 했음에도 의식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식만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인 인간에게는 '너는 사실상 존재의 근거가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자코메티가 자기 동생을 모델로 제작한 <디에고>역시 '무'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것들과 달리 가슴 부분의 양괴감이 무척 강해 '존제'의 느낌 또한 적지 않다. '무'와 '존재'가 중첩돼 있는 것이다. 가슴 부분의 물량감은 가늘고 긴 입상들의 두터운 받침대에서 연장돼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상의 두툼한 받침대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받쳐주는 기능과 함께 즉자 곧 사물을 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대지 혹은 세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연상 외에 한 가지 연상을 더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존재다.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은 '무'이면서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물 즉 즉자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대자이다. 대자가 다른 대자를 즉자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어떤 의식이든 스스로가 사물로 취급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따라서 서로를 사물로 취급하는 인간은 상호 적대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식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의 순환은 끝이 없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 대한 초기 사르트르의 비관저 설명이기도 하다.
가느다란 실루엣의 인간은 관자인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지만, 이렇듯 가슴이 두터운 인간이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는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지금 즉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모델과 우리 사이엑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 모델도 우리를 하나의 사물로 볼 것이다. <디에고>는 종국적으로 이런 존재와 무의 긴장 속에 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 아무 근거도 없는, 하나의 우연에 불과한 인간들이 서로를 사물로 보면서 영원한 갈등을 일으킨다. <디에고>는 한마디로 영원한 고독과 부조리로서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 누가 나을 것이 없는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이주헌,<미술로 보는 20세기>中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그래픽 디자이너-네빌 브로디

neville brody는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라퍼이다. 처음에는 회화를 공부했으나 1976년부터 3년간 런던 인쇄 대학(London college of printing)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졸업 후 몇 개의 음반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그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하였다.그 후 그는 1980,90년대 혁신적인 레이아웃,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독창적인 발상과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으로 주목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네빌 브로디는 󰡐디자인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한편 담배, 주류 등 그가 생각하는 도덕적 관념에서 벗어난 업종의 클라이언트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브로디의 작업은 이제 전자 기술적 정보전달 communication 전 영역에 의문과 창조어린 새로운 시각 언어 혁명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 시대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주 클라이언트는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 미국 등에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DMC라는 TV를 위한 디자인 회사를 차렸고 일본에서는CD_ROMPublishers Digitalogue와 가까이 일했다. 지금은 일본,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다국적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타이포그라퍼로 전자디자인의 역할을 연구하고 창조해내는 새로운 비주얼언어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대별 작업 활동
1981년~ 1986년 페이스 The face의 아트 디렉터로 근무하면서 펑크 Punk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전개하여 독창적인 활자체의 개발, 관습적 타이포그라피의 개혁, 혁신적인 레이아웃 등을 통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3년~ 1987년 City Limits라는 런던 주간 가이드 표지 디자인을 했다. 1985년 런던에 그의 스튜디오를 열었으며, 1987년에 아레나(Areana)에 합세, 다시 한 번 혁신적인 편집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후 "브로디 현상"으로까지 불리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1988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네빌 브로디의 그래픽 언어(The graphic Language of Neville Brody, 1988)라는 저서가 간행되었다.
1989년~1992년 독일의 템포 (Tempo), 프랑스의 악투엘 (Actuel), 이탈리아의 ''렐 앤 퍼 퓌 (Lel and Per Lui)의 잡지사에서 그의 뛰어난 타이포그라피를 보였다. 그리고 실험 글자 type 잡지인 를 통해 다시 한 번 브로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1990년 그는 실험적 잡지인 FUZE를 발간했던 Stuart Jensen과 함께 Font Works를 열었으며, Fontshop International의 제작자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 케이블채널 Premiere와 오스트리아 주 방송국 ORF. 전자 이미지작업의 변천은 Brody가 디지털 타입에 열중했음을 반영한다.
1994년 를 발간하여 그의 끊임없는 디자인 열정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작업 스타일
1. 텍스트를 무시하고, 북잡한 이미지를 만들어 냄.(아상블라주-지푸라기, 폐품 등을 이용한 기법-작품들)
2. 활자체의 깔끔한 선을 부각시켜 소용돌이 모양으로 돌아가는 이미지를 텍스트에 채움.(이미지와 활자 모두 사용하기 시작)
3. 글자를 비틀고 폰트를 뒤섞었으며, 부호들을 기발한 방법으로 사용 (현란한 그래픽 등을 사용하여 포스트 모던한 활자체를 만들어 냄)
시대에 저항하는 기하학적 실험 작업
미묘한 형상들이 제공하는 난해성, 그러면서도 외면해 버리고 싶지 않은 독특한 작품 세계의 연출, 이것이 바로 젊은 작가 네빌 브로디가 던져주는 매력이다. 타이포그래피의 시대적 한계성을 감지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독특한 언어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타이포그래피 그 자체가 갖는 어려움일 수 있다. 오늘날처럼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차원에로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네빌 브로디가 던져주는 창조성의 빛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그래픽디자인에 대해 전문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네빌 브로디의 작품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묘한 파편 모습의 난해성은 접근하기 어려운 수렁으로서 우리 앞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빌 브로디의 작품들을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쳐 버릴 순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이미 첫눈에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는 적잖은 파문을 던져주는 까닭에 그러하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그래픽 디자인의 획을 향해 확고히 정진, 이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본질적인 각성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방법론을 대거 출현시켰다. 우리는 뛰어난 <데 스틸(De Still)>사진작가 피에츠바르트(Piet Zwart)의 엄격하면서도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디자인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이미지의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메시지다."
그는 1928년 예술을 통해 세계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시도에서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는 "모든 시대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반역을 생산하는 요건을 지니고 있다"며 네빌 브로디의 혁명적 작품의 필요성에 대해 논평을 가했다. 타이포그래피만큼 전환기적 흐름과 단절되어 있는 분야는 없다. 캐롤링 왕조 시대의 소문자 발명은 서체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더 이상 형태의 본질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딕에서 르네상스, 이탤릭, 게르마닉, 그리고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로마자와 딱딱한 산세리프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단순한 장식의 변화로 일관된 흐름을 타고 진행되었다. 국제적으로 동일화된 평범한 서체와 자연스럽게 흘려 쓰는 흘림체의 경향이 있었고 흔치 않은 일로 가끔 관념과 리듬을 깨뜨린 기하학적 형태가 나와 당혹감을 안겨주었을 뿐 실지로 새로운 글자체의 격변은 없었다. 심지어 단어 (word) 자체가 사인으로 취급되었다.
규칙이란 근래에 등장한 강박관념이다. 앤톤 스테노브스키(Anton Stenkowski)를 시초로, 그 다음엔 신 그래픽 그룹이 구조적 그래픽을 산업적 커뮤니케이션에 적용시켰다. 조세프 뮬러 브로크만(Josef Miiler-Brockmann)의 구성적 그리드는 부자연스런 알람 시스템의 부분들을 구체화시켰다. 하지만 규칙을 내세운 부적당한 경우가 발생할 때마다 중지되었다.
얼마동안 그래픽 디자인은 그 원리와 기준에 캘빈주의를 적용, 금욕적이고 엄정한 논리에 의존해왔다. 때문에 그것은 종종 창의성과 신선미를 상실한 형식적 복잡함으로 시대를 역행해 왔다. 이는 방법론적 통일성과 어떤 면에서는 의도의 통일성 문제이다. 그 시대가 다양한 경험의 전이, 수많은 요구조건의 제시, 확고한 감성, 사용 언어의 상이함, 그리고 불필요하게 상호 공격적이고 무의식적인 새롭고도 흥미 있는 시각적 형상들을 도외시해 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도외시된 한 경우가 바로 영국의 새 세대로 가장 잘 알려진 청년 브로디이다.
그의 독특하고 비범하면서 복잡함과 난해함이 서로 얽힌 작품엔 여타의 시대에 대한 도전과 침략의 느낌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서체로 마치 "칼날 위를 달리는 사람"과 같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타이포그래피는 의도적으로 추한 중간색 또는 형태를 결여한 독소적인 모습의 단어를 사용한다. 즉 만자와 화살의 교차 사인, 터무니없는 독재자의 심벌 같이 그려진 마크 등으로 이 모든 것들은 먼지와 쓰레기들을 전달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과도한 표현이긴 하지만 문화적 흐름, 즉 은둔적으로 당대의 그래픽 작업에 있어서의 예술적 아이디어만 조직하려는 기성세대의 성향에 반발하여 진실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문화적 모델에 의해 진실성을 상실한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행동에 의한 자극 받음으로써 틀에 박힌 구세대의 작업에 반대하는 것이다.

Uncanny Valley





일본의 유명한 로봇 공학자인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1970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不氣味の谷 현상이라는 것을 소개하였다. 영어로는 uncanny valley라고 불리며 우리말로는 "불쾌한 골짜기"나 "이상한 골짜기"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이론의 골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로봇의 움직임이나 생김새가 인간의 모습에 근접하면 근접할 수록 더 호감을 갖지만 인간과 너무 비슷하면 오히려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예 완전히 흡사하면 괜찮지만 어중간하게 비슷했다간 되려 극도의 반발심을 유발한다. 악수를 한 상대방의 손이 의수임을 알아차렸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당혹감과 섬뜩함도 이 현상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공업용 로봇들과는 달리 한국과 일본 등에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정용 로봇의 모습을 보면 모두 다 한결같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몸통 위에 머리가 달려 있고 두 개의 팔이 달려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로봇에겐 사실상 머리도 필요없고 얼굴도 필요없다. 어차피 입을 벌리며 말을 할 것도 아니고 밥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로봇에게 입이 왜 필요한가? 팔이 두 개밖에 없는 것보단 세 개, 네 개 달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굳이 두 팔을 고집하는가? 그렇지만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로봇에 가장 친근함을 느낀다고 한다. 상상해 보라. 병든 노인을 간호해 주는 간병 로봇이 발이 수십 개 달린 지네 모양으로 생겼다든지 어린 아이를 돌봐 주는 베이비시터 로봇이 거미 모양으로 생겼다면 느낌이 과연 어떠할지? 태권 V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사마귀처럼 생겼었다면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로봇의 보행수단으로서 지네나 곤충처럼 생긴 발이 실제로 이동성이나 안정성 면에서 훨씬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로봇 공학자들이 인간과 같은 이족 보행 로봇을 만드는데 온갖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로 로봇이 인간을 닮으면 닮을 수록 사람들의 거부감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괴이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놓는 한 가설에 의하면 인간과의 공통점이 적은 로봇의 경우에는 인간과 닮은 부분이 부각되어 보이지만 거의 흡사할 정도로 닮은 로봇은 닮은 부분보다 오히려 닮지 않은 점들이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위화감을 조성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더 나아가서 인간과 지나치게 흡사한 로봇의 경우 생긴 것은 비록 사람 같아 보여도 무표정함, 풀린 눈동자, 차가운 피부 등의 미묘한 특성들 때문에 사람의 시체를 연상시키면서 오히려 거부감, 두려움, 섬뜩함 등의 감정을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이 uncanny valley 현상은 비단 로봇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올 봄 2006 E3 게임 컨벤션에서 Quantic Dream사가 의 후속작으로 개발하고 있는 게임 의 테크 데모를 공개했는데 모션 캡처 기술을 기반으로 한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과 캐릭터 모델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이 영상이 알게 모르게 혐오심을 유발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Casting Call, 즉 "오디션"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이 영상은 헤비 레인에 사용된 게임 엔진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프리렌더가 아닌 인게임 엔진으로 직접 제작된 홍보 동영상으로서 게임의 주인공역을 "연기"한 가상의 배우가 게임 제작자를 찾아와서 주인공 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을 본다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되어있다. (연기 경험이 있냐는 감독의 질문에 키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원하는 머리 색깔이 아니라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낙방을 했다고 대답하는 주인공. 오디션을 통해 혼신의 연기를 선보인 후 방을 나가자 "꽤 괜찮지 않았어요?" 하는 조감독의 질문에 감독, "괜찮으면 뭐해? 키가 너무 크잖아" 이래 버린다...-_-) 아래의 동영상은 너무 흐려서 디테일이 잘 안 보이니 필히 HD화질 동영상을 다운받아서 보기 바란다.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사실적인 인간의 묘사이지만 아주 미묘하게 어색한 점들이 왠지 더욱 돋보이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유럽에서 만든 게임이다 보니 주인공역을 맡은 여자 성우의 영어 발음에 액센트가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왠지 캐릭터에게 약간의 정신 장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설정상 실제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Uncanny valley와는 조금 무관한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id soft의 기대작 가 나왔을 때 인터뷰를 통해 제작자 존 카멕은 전편에 비해 현저히 느려진 게임 플레이에 관한 질문에 대해 비슷한 이유를 대며 해명을 한 적이 있었다. 즉, 오리지널 둠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래픽이 원시적이어서 만화 캐릭터 같이 생긴 주인공이 아무리 오두방정을 다 떨며 스크린상을 헤집고 뛰어다녀도 사람들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둠3의 그래픽은 실사에 가까운 현실적인 그래픽을 자랑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너무 빨리 뛰어다니거나 사방에 점프를 하고 다니면 비현실적인 요소가 오히려 더 부각되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특수효과에 컴퓨터 그래픽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uncanny valley 현상은 영화에서도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초의 풀 CGI 영화임을 자랑했던 파이널 판타지 영화판은 극도로 사실적인 그래픽을 자랑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평이 있다.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등으로 유명한 픽사의 경우 <인크레더블>에서 사실적인 배경 화면과는 달리 만화와 같이 2D 느낌을 주는 스타일라이즈된 캐릭터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픽사측은 정밀한 묘사를 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uncanny valley 현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적극적 해결책이었다고 해명을 한 바 있다.
한편 인크레더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을 한 워너브라더스의 경쟁작 <폴라 익스프레스>의 경우는, 3D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사실적인 인물 묘사로 인해 영화의 주타겟이었던 어린이들이 일부 (특이 어린 아이들이) "무섭다"는 반응을 보이며 극장에서 나가겠다고 울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유명한 영화 평론가인 리차드 로퍼 역시 <폴라 익스프레스>를 관람하면서 무의식 중에 이 uncanny valley의 존재를 인식한 듯하다. 그는 자신의 영화평을 통해 영화에 대한 수많은 칭찬을 늘어놓던 도중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Now as much as I love this film, I have to say there's something creepy and haunting about some of the scenes. With their big eyes and sad faces, some of the children are kinda spooky-looking."
"제가 이 영화를 정말로 좋아하긴 합니다만 일부 장면들에선 좀 괴이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커다란 눈에 슬픈 얼굴을 한 어린 아이들[주인공들]의 모습이 왠지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실제 인물을 본떠 만든 밀랍 인형을 볼 때 우리는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라는 표현을 무의식 중에 사용하곤 한다. 왜 제임스 딘은 멋있어도 제임스 딘을 빼닮은 인형은 "섬뜩"할까? 로봇 기술이 발전하고 컴퓨터 그래픽이 나날이 진보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신을 닮은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맞딱뜨릴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골짜기를 뛰어넘기 위해 앞으로 어떠한 돌파구를 마련해낼지 궁금해진다.


Uncanny Valley 관련 글:
- http://www.androidscience.com/theuncannyvalley/proceedings2005/uncannyvalley.html
- http://www.arclight.net/~pdb/nonfiction/uncanny-valley.html
- http://en.wikipedia.org/wiki/Uncanny_valley
- http://ja.wikipedia.org/wiki/%E4%B8%8D%E6%B0%97%E5%91%B3%E3%81%AE%E8%B0%B7%E7%8F%BE%E8%B1%A1
- http://robot01.com/contents/news_view.php?page=0&num=1404&search_field=&search_word=&bod_code=B00002
- http://www.slate.com/id/2102086/
- http://natsuo-omodaka.no-blog.jp/qualia/2004/09/post_16.html
- http://hotwired.goo.ne.jp/news/20051212201.html

모리 마사히로 관련 글:
- http://en.wikipedia.org/wiki/Masahiro_Mori
- http://robofesta-mie.com/cup.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