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놀자판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는 사람, 달을 가리키는 여사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해요"
- 이상은, 책<21세기를 바꾸는 교양> 中 -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개전
예술의 전당의 '개전'을 다녀오다. 개들이 왕왕 울부짖는 '개판'다운 전시회. '개'를 이해해보고, '개와 인간'을 뒤집어보고, '개'의 입장에서 이야기해고, '개'를 다시 만들어보았던 전시회. 한가지 소재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작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음.
'개전' 앞줄에 적혀있는 글들
<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이고,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자세와 노력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새로운 자기(나)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혁명이 되어야 한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사명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미지 생산'과 '의미생산'을 통해 사회에 대한 말걸기이다>
<세상앞에 우뚝서는 연습을 하려면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난을 자청함으로써 가능하다>
'개전' 앞줄에 적혀있는 글들
<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이고,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자세와 노력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새로운 자기(나)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혁명이 되어야 한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사명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미지 생산'과 '의미생산'을 통해 사회에 대한 말걸기이다>
<세상앞에 우뚝서는 연습을 하려면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난을 자청함으로써 가능하다>
김종학 프로덕션 기획프로듀서 채용공고
<김종학 프로덕션 기획프로듀서 채용공고> 2006/09/05 일자의 글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글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적어놓음.
기획 프로듀서_요구되는 능력
1) 드라마 아이템이 될 만한 오리지널 스토리나 원작을 착안/발견할 수 있는 능력과 드라마에 대한 애정.
2) 발견한 아이템의 컨셉을 잡아 문서/구두로 작가/감독/배우/상사를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3) 이 과정에서 생기는 난관과 저항, 반대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뚝심과 자신감. 끈기. 그리고 체력.
4)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학 자신의 아이템이 채택되지 않았을 때 상사와 조직에 순응하는 팀 마인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자신의 아이템을 숙성시켜 결국은 설득에 성공하는 용의주도함.
5) 협찬/PPL기획력, 영업마인드.
기억하고 싶은 글이 있어서 여기에 다시 적어놓음.
기획 프로듀서_요구되는 능력
1) 드라마 아이템이 될 만한 오리지널 스토리나 원작을 착안/발견할 수 있는 능력과 드라마에 대한 애정.
2) 발견한 아이템의 컨셉을 잡아 문서/구두로 작가/감독/배우/상사를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과 커뮤니케이션 스킬.
3) 이 과정에서 생기는 난관과 저항, 반대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뚝심과 자신감. 끈기. 그리고 체력.
4)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학 자신의 아이템이 채택되지 않았을 때 상사와 조직에 순응하는 팀 마인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자신의 아이템을 숙성시켜 결국은 설득에 성공하는 용의주도함.
5) 협찬/PPL기획력, 영업마인드.
김민수 "모던디자인비평"
누군가 이 책 전체를 통해 필자가 밝히고자 했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해보라고 주문한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그것은 디자인의 '반성적 성찰의 인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필자가 이 책을 통해 논의했던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포스트 모던과 해체로의 이탈 과정은 철학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또는 그것이 규정했던 규범 체계들에 대한 반성을 통한 '극복'(하버마스식의)과 '초월'(데리다와 푸코식의)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이러한 이탈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필자는 그동안 적용되었던 디자인 실무와 교육에 대한 냉철한 반성적 성찰만이 앞으로의 방향 설정에 진정으로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디자인의 실무와 교육을 통해 적용되었던 상당히 많은 주된 가치들이 이미 많은 변화를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변화의 양상은 디자인의 개념 자체에 대한 수정으로까지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앞서 우리가 살펴 보았들이 결코 우연에 의해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뚜렷한 역사적, 정치 - 경제적, 사회 - 문화적 인과 관계들 속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디자인은 그와 같은 현재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설득력있는 해석이나 그 자체를 평가하기 위한 어떠한 수단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이 책에서 필자가 모더니즘 이후의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디자인을 그 철학적 견해에서부터 디자인 실행까지 연결시키면서 조명한 데 대해 그와 같은 외래적 현상들이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혹자들은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원래 '디자인'이란 개념 자체도 외래적으로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한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은 왜 디자인의 개념 자체를 수입된 시점에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서구 사회에서조차 그 개념을 포기 또는 수정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애써 도외시하고 있는가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역사 의식의 취약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이는 달리 말해 스스로를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결별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오늘날의 디자인의 개념적 변화가 서구적 상황에서 발생된 현상이라 간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정치 - 경제적, 사회 - 문화적 변화 속에서 볼 때 결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또한 우리가 과거의 통제된 유형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정보와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든 현상은 결코 어떤 특수한 문화 지형 내에서 고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시공간 상의 변화도 부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태평양 전쟁 당시 어떤 섬에서 땅굴을 파고 옥쇄(玉碎)하다 살아 남아 몇 십년 뒤 땅 밖으로 기어나온 일본군이 자신은 아직도 '황국(皇國)을 지키는 전사'라고 울부짖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세계 문화적 보편성을 위해 우리 고유의 특수성을 희생시켜온 우리에게 현재 직면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석의 방향이 어느 한쪽을 배격하면서 다른 한쪽만을 강조해야 하는 모습으로 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은 세계적 보편성과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그 참다운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난 40년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 놓은 국제적 '보편성'을 얻기 위해 총력을 다해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문화적 '특수성'들이 '보편성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유실되고 망각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 우리 고유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문화 저변에서부터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흥행이 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접해졌듯이). 어찌 보면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조장되기 시작한 것은 보편성이 어느 정도 획득되기 시작한 아주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디자인의 임무는 현재 이중적인 과제로 남는다. 즉 우리는 한편으로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보편적인 디자인 어휘를 전개시켜야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서 어떠한 디자인을 어떻게 현대 디자인의 맥락으로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요즘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한 표어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성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요즘 모 기업에서 개발된 "누룽지를 만들 수 있는 전자 밥통"과 "물걸레질하는 진공 소제기"와 같은 제품들이 우리와 다른 문화 공간 속에 곧바로 적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결국 국수주의적인 자기 도취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반대로 외래 문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반대로 자기 멸시와 허무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해석하는 태도에 한가지 문제가 있음을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유달리 한국에서 알레르기 반응식으로 곧잘 매스컴을 통해 떠들어 대는 "문화 침투(cultural invasion)"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文化觀)'이 이 두 단어의 결합 속에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일상적 용례에서 우리가 "~에 침투하다 또는 침투해 들어가다"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원래 '침투'라는 말은 특정한 공간 또는 상황이 전제된 말이다. 침투라는 말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공간 또는 허약한 대상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며, 공간을 특정하게 한정지울 수 없을 만큼 원대하거나 강인한 것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로(특정 공간 속으로) 외계인이 침투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지구인이 우주에 침투하다" 라는 말은 별로 의미있는 말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병원균이 몸에 침투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겨 항균력이 약해졌을 때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침투가 문화라는 말과 결합되어 "문화 침투"란 말이 되었을 때 이 복합어는 어떤 이질적 문화가 침투하게 되는 대성으로서 '고정된, 정체된, 비역동적인, 허약한 문화 공간'을 지시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해 어떤 이질 문화가 침투하고 있다고 호들갑 떨며 경고식의 말을 해대는 것은 우리 문화의 비역동적 정체성을 자인하는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갖고 있던 쪽박마저 깨질까봐 벌벌 떨고 있는 너무나 미약한, 주체적 자존심도 없는 존재들로 매도하게 되는 말이 된다. 그 말은 우리 문화를 정체된 허약함으로 규정지움으로써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결국에는 소인배임을 자처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때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내요시가 "한국과 그 예술"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미(美)를 반도적인 지리적 특성과 그로 인한 비참한 역사로 각인된 것으로 파악해 "애상적인 비애의 미"로 서술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문화 침투란, 스스로를 우주적 공간으로 원대하게 여기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강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에 대해서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용어이다. 또한 그 문화가 주체적 자아를 갖고 있다면 설사 수퍼 헤비급의 이질적인 것이 침투한다고 해도 자체의 문화적 에너지로 용해시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문화 침투라는 용어 속에서 스스로를 소인배로 격하시키게끔 유도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성 말살의 망령이 되살아남을 느끼곤 한다. 대한 민국 헌법 전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가를 "한반도와 부속 영토로"규정짓고 있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를 정체적인 불변의 공간적 의미로 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갖게된 문화 개념은 뜨겁게 살아 숨쉬는 오늘의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무덤에서 파낸 '골동' 문화밖에는 없는 것이다. 왜 문화는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의 손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점에 대해 필자가 지난 1986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 59가의 IBM 갤러리에서 보았던 한 전시회에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도쿄, 형태와 정신(Tokyo, Form&Spirit)"이라는 전시회로 일본 문화 재단과 유수의 일본 기업들의 후원으로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 사진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마련된 것이었다. 그 전시회는 일본의 전통성과 현대의 조형적 실험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전시회였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필자의 뒤통수를 쳤던 것은 8폭짜리 병풍이었다. 그것은 칼을 들고 군무를 추고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수 놓은 것이었는데, 색이 좀 바래 누가 보아도 '에도 시대' 이전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골동품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병풍을 눈여겨 보다가 그림의 하단부에 사무라이가 신고 있던 신발이 '나이키' 운동화임을 발견하고 필자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잠시 후 그것은 그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아아! 이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과거로 오가며 내일로 향해가는 사람들이구나. 두고두고 필자는 그 '나이키를 신은 사무라이'의 망령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일본은 우리가 이땅에서 애써 부인하고 그로 인해 편협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커진 나라이다. 일본의 위상이 훨씬 더 커진 원동력은 바로 그와 같이 과거를 오늘에서 정의하려는 노력과 그로 인해 '골동'을 그 자체로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로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문화적 역동성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옛 선조들이 일보에 전해준 고대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일본에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기 최면에 빠진 '골동' 문화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편협하고 배타적인 속성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우리는 영원히 '수비형'의 문화로 남아 있으라는 주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져왔던 이와 같은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에 일대 방향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는 언제 침투할지 모를 외래 문화에 대해 언제까지 불한한 '수비형'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말이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 대응하고, 우리의 문화를 외부적으로 발산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 문화 내에서 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수비형의 자세를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상당히 철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안에 주체적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주체적 자아라는 자기 - 정제력을 가진 여과체가 있을 때 또한 그러한 주체들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양질의 문화를 식별해 냄으로써 스스로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자생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위로부터 명령에 의해 하달된 것(top - down)이 아니라 자체의 여과 기능을 통해 '아래로부터 형성된 문화(bottom - up culture)'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학술적인 설명 이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설사 어떠한 외래 문화들의 침투가 융단 폭격식으로 가해진다 해도 붕괴되기는 커녕 끊임없는 생성 과정을 통해 계속적으로 자체 문화의 폭을 증식시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감각과 하께 자기 - 여과력의 기능이 우리의 문화 속에 있어 준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추구해온 디자인스럽게 보이는 '모조 디자인(pseudo - design)'의 차원을 벗어나 개념 설정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의 해석을 디자인에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앞서 보았던 베네통사의 고아고, 멤피스의 산업 디자인, 꼼드 갹송의 패션이 넓혀 놓은 '인식의 범위까지만' 디자인해야 하는가? 그러한 창의적인 작업들이 이 땅에 처음 소개될 때면 으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디자인이 아니야!" 라고 애써 거부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온통 그와 같은 것들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창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허물어 버린 창조적 인식의 그늘을 더 좋아하는가 말이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의 디자인 교육 커리큘럼이 그동안 어떠한 재평가도 없이 다시 바우하우스 또는 울름 조형대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서구식 커리큘럼을 '구색 맞추기식'으로 복제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디자인 운동들이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일말의 재고도 없이 받아 들여져 마치 그것들 아니면 교육이 망가지는 것처럼 소중시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의 디자인 교육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념적 오류와 그것으로 인해 각인된 디자인 교육의 방식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앞서 필자가 바우하우의 좌익 성향과 당시 독일의 철학적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듯이, 사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당시의 나찌 독일을 가능하게 했던 기반 속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나찌의 국가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 우익 정치 이념은 좌익 바우하우스를 폐교시키고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킨 계기를 제공했지만, 이념 자체로 보았을 때 나찌의 정치 이념은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른바 나찌가 수백만 유태인 대량 학살의 명분으로 삼았던 게르만 민족의 단일한 '혈통적 순수성' 보존의 이념과 디자인에 있어 어떠한 개별적인 탐색과 표현성도 말살시킨 모던 디자인의 순수한 '기능적 순수함'의 이념 사이에는 은유적인 것 이상의 직접적인 유사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똑같은 동전에 찍혀진 양면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역사적 공간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가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이억만리 떨어진 이 땅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디자인 교육의 유일한 패러다임으로 언제나 찬양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 우리는 현 시대에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는 철학적, 정치 - 경제적, 사회적 - 문화적 구조 위에서 그동안 추구해 왔던 디자인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디자인 자체의 비평적 기능을 파생시킴으로써 철저한 '자기 - 반성'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될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디자인이 어떠한 위상에서 어떤 목표로 향해 가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상과 목표를 설정하려는 어떠한 자체의 논의도 없이 다만 그럴듯 해보이는, 또는 남들이 우려 먹다 버린, 방법론의 도입을 되풀이 함은 마치 키없이 바다 위에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지 않겠는가?
김민수,"모던디자인비평" (안그라픽스, 1994) 중 <맺음말>
이 책에서 필자가 모더니즘 이후의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디자인을 그 철학적 견해에서부터 디자인 실행까지 연결시키면서 조명한 데 대해 그와 같은 외래적 현상들이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혹자들은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원래 '디자인'이란 개념 자체도 외래적으로 수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한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은 왜 디자인의 개념 자체를 수입된 시점에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서구 사회에서조차 그 개념을 포기 또는 수정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애써 도외시하고 있는가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역사 의식의 취약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이는 달리 말해 스스로를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결별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오늘날의 디자인의 개념적 변화가 서구적 상황에서 발생된 현상이라 간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정치 - 경제적, 사회 - 문화적 변화 속에서 볼 때 결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또한 우리가 과거의 통제된 유형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정보와 자본의 흐름이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면, 모든 현상은 결코 어떤 특수한 문화 지형 내에서 고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시공간 상의 변화도 부인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태평양 전쟁 당시 어떤 섬에서 땅굴을 파고 옥쇄(玉碎)하다 살아 남아 몇 십년 뒤 땅 밖으로 기어나온 일본군이 자신은 아직도 '황국(皇國)을 지키는 전사'라고 울부짖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세계 문화적 보편성을 위해 우리 고유의 특수성을 희생시켜온 우리에게 현재 직면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분석의 방향이 어느 한쪽을 배격하면서 다른 한쪽만을 강조해야 하는 모습으로 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은 세계적 보편성과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때 그 참다운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난 40년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 놓은 국제적 '보편성'을 얻기 위해 총력을 다해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문화적 '특수성'들이 '보편성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유실되고 망각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 우리 고유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문화 저변에서부터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흥행이 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접해졌듯이). 어찌 보면 이러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조장되기 시작한 것은 보편성이 어느 정도 획득되기 시작한 아주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디자인의 임무는 현재 이중적인 과제로 남는다. 즉 우리는 한편으로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보편적인 디자인 어휘를 전개시켜야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라는 특수 문화권에서 어떠한 디자인을 어떻게 현대 디자인의 맥락으로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요즘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한 표어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성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요즘 모 기업에서 개발된 "누룽지를 만들 수 있는 전자 밥통"과 "물걸레질하는 진공 소제기"와 같은 제품들이 우리와 다른 문화 공간 속에 곧바로 적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결국 국수주의적인 자기 도취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반대로 외래 문화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반대로 자기 멸시와 허무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해석하는 태도에 한가지 문제가 있음을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유달리 한국에서 알레르기 반응식으로 곧잘 매스컴을 통해 떠들어 대는 "문화 침투(cultural invasion)"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文化觀)'이 이 두 단어의 결합 속에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일상적 용례에서 우리가 "~에 침투하다 또는 침투해 들어가다"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원래 '침투'라는 말은 특정한 공간 또는 상황이 전제된 말이다. 침투라는 말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공간 또는 허약한 대상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며, 공간을 특정하게 한정지울 수 없을 만큼 원대하거나 강인한 것에 대한 작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로(특정 공간 속으로) 외계인이 침투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지구인이 우주에 침투하다" 라는 말은 별로 의미있는 말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병원균이 몸에 침투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겨 항균력이 약해졌을 때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침투가 문화라는 말과 결합되어 "문화 침투"란 말이 되었을 때 이 복합어는 어떤 이질적 문화가 침투하게 되는 대성으로서 '고정된, 정체된, 비역동적인, 허약한 문화 공간'을 지시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해 어떤 이질 문화가 침투하고 있다고 호들갑 떨며 경고식의 말을 해대는 것은 우리 문화의 비역동적 정체성을 자인하는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갖고 있던 쪽박마저 깨질까봐 벌벌 떨고 있는 너무나 미약한, 주체적 자존심도 없는 존재들로 매도하게 되는 말이 된다. 그 말은 우리 문화를 정체된 허약함으로 규정지움으로써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결국에는 소인배임을 자처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제 때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내요시가 "한국과 그 예술"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미(美)를 반도적인 지리적 특성과 그로 인한 비참한 역사로 각인된 것으로 파악해 "애상적인 비애의 미"로 서술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문화 침투란, 스스로를 우주적 공간으로 원대하게 여기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강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에 대해서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용어이다. 또한 그 문화가 주체적 자아를 갖고 있다면 설사 수퍼 헤비급의 이질적인 것이 침투한다고 해도 자체의 문화적 에너지로 용해시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문화 침투라는 용어 속에서 스스로를 소인배로 격하시키게끔 유도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성 말살의 망령이 되살아남을 느끼곤 한다. 대한 민국 헌법 전문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가를 "한반도와 부속 영토로"규정짓고 있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를 정체적인 불변의 공간적 의미로 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갖게된 문화 개념은 뜨겁게 살아 숨쉬는 오늘의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무덤에서 파낸 '골동' 문화밖에는 없는 것이다. 왜 문화는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의 손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점에 대해 필자가 지난 1986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 59가의 IBM 갤러리에서 보았던 한 전시회에서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도쿄, 형태와 정신(Tokyo, Form&Spirit)"이라는 전시회로 일본 문화 재단과 유수의 일본 기업들의 후원으로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 사진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마련된 것이었다. 그 전시회는 일본의 전통성과 현대의 조형적 실험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전시회였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필자의 뒤통수를 쳤던 것은 8폭짜리 병풍이었다. 그것은 칼을 들고 군무를 추고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수 놓은 것이었는데, 색이 좀 바래 누가 보아도 '에도 시대' 이전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골동품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병풍을 눈여겨 보다가 그림의 하단부에 사무라이가 신고 있던 신발이 '나이키' 운동화임을 발견하고 필자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잠시 후 그것은 그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아아! 이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로, 현재를 과거로 오가며 내일로 향해가는 사람들이구나. 두고두고 필자는 그 '나이키를 신은 사무라이'의 망령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일본은 우리가 이땅에서 애써 부인하고 그로 인해 편협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커진 나라이다. 일본의 위상이 훨씬 더 커진 원동력은 바로 그와 같이 과거를 오늘에서 정의하려는 노력과 그로 인해 '골동'을 그 자체로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로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문화적 역동성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옛 선조들이 일보에 전해준 고대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일본에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기 최면에 빠진 '골동' 문화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편협하고 배타적인 속성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우리는 영원히 '수비형'의 문화로 남아 있으라는 주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져왔던 이와 같은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에 일대 방향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는 언제 침투할지 모를 외래 문화에 대해 언제까지 불한한 '수비형'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말이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 대응하고, 우리의 문화를 외부적으로 발산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 문화 내에서 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수비형의 자세를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상당히 철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안에 주체적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주체적 자아라는 자기 - 정제력을 가진 여과체가 있을 때 또한 그러한 주체들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양질의 문화를 식별해 냄으로써 스스로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자생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위로부터 명령에 의해 하달된 것(top - down)이 아니라 자체의 여과 기능을 통해 '아래로부터 형성된 문화(bottom - up culture)'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학술적인 설명 이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설사 어떠한 외래 문화들의 침투가 융단 폭격식으로 가해진다 해도 붕괴되기는 커녕 끊임없는 생성 과정을 통해 계속적으로 자체 문화의 폭을 증식시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균형감각과 하께 자기 - 여과력의 기능이 우리의 문화 속에 있어 준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추구해온 디자인스럽게 보이는 '모조 디자인(pseudo - design)'의 차원을 벗어나 개념 설정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의 해석을 디자인에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앞서 보았던 베네통사의 고아고, 멤피스의 산업 디자인, 꼼드 갹송의 패션이 넓혀 놓은 '인식의 범위까지만' 디자인해야 하는가? 그러한 창의적인 작업들이 이 땅에 처음 소개될 때면 으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디자인이 아니야!" 라고 애써 거부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리는 온통 그와 같은 것들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창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허물어 버린 창조적 인식의 그늘을 더 좋아하는가 말이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의 디자인 교육 커리큘럼이 그동안 어떠한 재평가도 없이 다시 바우하우스 또는 울름 조형대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서구식 커리큘럼을 '구색 맞추기식'으로 복제하고 있다면, 이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디자인 운동들이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일말의 재고도 없이 받아 들여져 마치 그것들 아니면 교육이 망가지는 것처럼 소중시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의 디자인 교육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념적 오류와 그것으로 인해 각인된 디자인 교육의 방식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앞서 필자가 바우하우의 좌익 성향과 당시 독일의 철학적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듯이, 사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당시의 나찌 독일을 가능하게 했던 기반 속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나찌의 국가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 우익 정치 이념은 좌익 바우하우스를 폐교시키고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킨 계기를 제공했지만, 이념 자체로 보았을 때 나찌의 정치 이념은 모던 디자인의 이념과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른바 나찌가 수백만 유태인 대량 학살의 명분으로 삼았던 게르만 민족의 단일한 '혈통적 순수성' 보존의 이념과 디자인에 있어 어떠한 개별적인 탐색과 표현성도 말살시킨 모던 디자인의 순수한 '기능적 순수함'의 이념 사이에는 은유적인 것 이상의 직접적인 유사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똑같은 동전에 찍혀진 양면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역사적 공간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가 파생시킨 교육 이념들이 이억만리 떨어진 이 땅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디자인 교육의 유일한 패러다임으로 언제나 찬양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 우리는 현 시대에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는 철학적, 정치 - 경제적, 사회적 - 문화적 구조 위에서 그동안 추구해 왔던 디자인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디자인 자체의 비평적 기능을 파생시킴으로써 철저한 '자기 - 반성'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될 때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디자인이 어떠한 위상에서 어떤 목표로 향해 가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상과 목표를 설정하려는 어떠한 자체의 논의도 없이 다만 그럴듯 해보이는, 또는 남들이 우려 먹다 버린, 방법론의 도입을 되풀이 함은 마치 키없이 바다 위에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지 않겠는가?
김민수,"모던디자인비평" (안그라픽스, 1994) 중 <맺음말>
자존심은 존재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
...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자존심은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자존심, 예컨대 '내가 이런 지위인데,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슴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그래서 어디서 낮게 평가를 받든, 이른바 자존심이 상하지 않거든요.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그 둘을 분류해서, 재료 상태로서의 삶, 그냥 태어나서 사는 삶을 '비오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이올로지'라고 할 때 그 '비오' 있잖아요. 그 비오스로서의 삶, 그것만으로는 실존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료 상태이기 때문에, 형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형태과학'은 말하자면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구성하는 거죠.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재료 상태의 삶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것, 그래서 자기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 사람들이 사는 원리였고, 이것을 우리가 실존미학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실존미학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겠죠. 자기를 존중하면 자기 삶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기 삶을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것을 삶에서 최고 목표로 삼게 되죠. 그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 삶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고요.
철학자 미셸 푸코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 <자기의 테크놀로지>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온 내용들에 제가 크게 공감했습니다. 이분이 좀 오래 살았으면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 텐데, 바로 뒤에 에이즈로 죽었죠. 그래서 문제의식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근데 철학에서는 인간을 '주체'라고 하지요. 주체라는 것은 세계에 대해 그 위에 있는 것이고, 나, 곧 주체는 1인칭이고 세계는 3인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인칭은 3인칭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인식하고 변형하지요. 나아가 자연을 '자원의 보고'라고 하면서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렸는데,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간관계 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든요. 또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생각한 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멋있는 말로 하면,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주체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체로 만드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학생을 배려한다기보다, 어떤 개별자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코드에 강제로 뜯어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의무적으로 일기를 쓰지요? 제가 제 조카가 옛날에 쓴 일기장을 봤는데,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햇빛은 쨍쨍, 오늘 맑음, 오늘은 누구랑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오늘의 반성할 점을 꼭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의 반성할 점, "오늘 일기를 내일 썼다". (청중 웃음)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를 감시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편적 코드에서 벗어나는 일을 했으면 고해성사를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잘 이뤄지게 됐을 때 흔히 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철들면 예전에 밖에서 감시하던 것을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감시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사회 코드에 맞게, 자기 사회 필요에 맞게 인간들을 뜯어 맞춰요. 그래서 벗어나면 처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율적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 한때는 타율이던 것이 내재화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여러분들 아마 어렸을 때는 이닦기 굉장히 싫어하셨죠? 그래서 날마다 혼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이를 닦지 않고 자면 어떠십니까? 찝찝하잖아요.(웃음) 원래 동물들은 이빨 닦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게 내면화되면 오히려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른바 '이제 철들었다', 타율이 아니라 '알아서 하게 됐다', '자율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셸 푸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자율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자율인가 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율이란 게 사실은 내면화된 타율에 지나지 않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내 안에 들어와 체화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잖아요. 군대 갔다 와서 사람된 그 사람, 이건이 근데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이고 그들의 이상입니다. '세계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근데 철학의 이상에 대해 미셸 푸코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현실을 폭로한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있는 의견, 내가 갖고 있는 견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것들도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떠드는 겁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걸 내가 그냥 계속해서 떠드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말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가 안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면에서 미디어의 확장입니다.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해버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자기가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푸코가 볼 때는 어떤 면어서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이고, 의식이라는 것은 담론의 효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푸코는 주체를 객관화, 객체화시켜버립니다. 알고보면 인간이라는 것, 주체라는 것이 거대한 거미줄 망에 걸린 한 마리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허탈해지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우린 뭘 하라는 말이냐. 여기서 미셸 푸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가,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규범적인 문제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덯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셸 푸코가 바로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에서 끄집어내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갖고 있던 존재 미학을 끄집어냈고, 그래서 푸코의 후기 사상은 인간이 자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 내가 나 자신을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를 탐구합니다. 이때 이 사람이 쓰는 '자기'라는 말이 '주체'를 대신한 말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근대 철학에 오염됐다고 생가했기 때문에 불어 '스와(soi)'를 '자기', '자아'라는 개념으로 썼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드는 그 주체 형성의 방식을 봤더니, 예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앞서 예로 든 일기는 고해성사 형식입니다. 내가 한 일을 쭉 쓰고 나서 바깥의 사회규범과 비교해서 거기서 빗나간 것을 스스로 고해하게 하는 거죠. 그리스 사람들도 일기를 썼는데, 작가들이 쓰는 일종의 착작노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성이 있다기보다, 오늘은 뭘 했는데 책을 좀 덜 읽은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책을 좀 더 많이 읽어야지 하는 식이었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개별자를 옹호하고 존중해주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이라는 게 보편적 도덕이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편에서 시작해서 개별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을 살려주면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식의 도덕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푸코는 그것을 다시 되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을 되살리는 데 있어, 존재에 관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적인 측면입니다. 인간 주위를 둘러보면 다 권력이거든요. 권력이라는 게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다 권력입니다. 집안에도 있고, 학교에 가면 학생과 교수 관계고 권력이고, 회사 가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도 있지요.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행동이 문제가 되면,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굉장히 많은 권력의 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면 굉장히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그야말로 존재를 위해서 자기의 진짜 존재, 곧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정말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는 사람들, 자기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살리려는 사람들은 때로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형태죠. 예컨대 보헤미안 같은 경우는, '보헤미안의 십계명'이라는 게 있어요. 부모를 짚신처럼 알아라, 친구 배신하기를 밥 먹듯 하라 등등.(웃음) 그건 뭐냐 하면 주위에서 자기한테 들어오는 힘들이 워낙 상투화되고 관습화된 권력들이니까 그것들을 다 배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조적 개새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는 기지가 팔요한 것 같아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덜 강압적이거든요. 그러면서 어떤 면에서는 규정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들한테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면,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야, 그게 뭐냐, 쪽팔리게"라고 하면, 사람이 나쁜 일은 해도 쪽팔리는 일은 못하는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더 강하게 체면이 구겨진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 강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 그리스에서는 욕망이 바로 에로스거든요. 자기한테 결여된 것을 바라는 것이 에로스예요.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욕망하지요. 이것은 타동사적으로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욕망은 자동사로서의 욕망, 곧 무엇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욕구 같은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지요. 자기 잠재성을 충분히 펴는 상태가 되고 싶어하는 거지요.
그리스 사람들이 덕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레테는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행복한 것이고, 그런 상태가 바로 아레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예컨데 권력관계라든지 또는 잘살기 위해서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아니면 남들보다 더 높은 지우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살 때, 그리스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덕의 상태가 아니며 매우 불행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프로그래머인데 제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컴퓨터로 한글 문서 작업하고 인터넷 검색만 하는 것은 컴퓨터가 발휘할 수 있는 전체 기능 중에 약 0.0001퍼센트만 활용하는 거라고 합니다.(웃음) 그러니까 컴퓨터 활용의 아레테 상태가 아닌 거예요. 바깥에 있는 무엇에 대한 욕망, 곧 타동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자동사의 욕망이 희생하는 것은 아레테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무엇과 타협해서 어디에 들어가면 뭐가 되고, 뭐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겠죠. 사람들이 저에게 굽실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거든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책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은 특권층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특권층이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까지 되니까요. 그렇게 살면서 저는 제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동사의 욕망이 아니라 자동사의 욕망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동사의 욕망일 때는 바깥에서 회유나 위협, 예컨대 "너 밥줄 끊어버릴 거야", 아니면 "이거 해줄게"라고 하면서 사람을 망가뜨리잖아요. 그런데 아예 그걸 포기하고 살면, 협박받을 것도 없지요. "밥줄 끊을 거야" 그러면 "끊어봐", 또 "이거 해줄게"그러면 "너나 과자 많이 사 먹어"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뭐랑 똑같으냐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상황을 한번 보세요.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당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물으면서 쳐다보니까, 디오게네스가 "비켜줘. 햇볕 좀 쬐게"라고 했거든요.
알렉산드라는 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걸 가졌지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디오게네스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욕망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알렉산드라가 갖고 있는 게 먹히질 않아요. 남이 부러워해야 자기가 자랑스러워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부러워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알렉산드라는 "내가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로 태오나고 싶다. 그래도 끝까지 대왕이 되고 싶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개였잖아요. '시미시즘'이라는 말이 원래 개예요. 개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의미죠. 디오게네스가 "나는 개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대왕은 개가 되고 싶었는데, 개는 대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욕망 자체가 다른 거죠. 대왕이 갖고 있는 정복욕이나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떤 한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됐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자동사로서의 욕망이라는 거죠...
- 진중권, 도서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중 -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그 둘을 분류해서, 재료 상태로서의 삶, 그냥 태어나서 사는 삶을 '비오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이올로지'라고 할 때 그 '비오' 있잖아요. 그 비오스로서의 삶, 그것만으로는 실존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료 상태이기 때문에, 형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형태과학'은 말하자면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구성하는 거죠. 다른 말로 쉽게 말하면,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재료 상태의 삶이 아니라 거기에 자기 스타일을 주는 것, 그래서 자기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 사람들이 사는 원리였고, 이것을 우리가 실존미학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실존미학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겠죠. 자기를 존중하면 자기 삶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기 삶을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것을 삶에서 최고 목표로 삼게 되죠. 그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 삶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고요.
철학자 미셸 푸코라는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책이 <자기의 테크놀로지>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온 내용들에 제가 크게 공감했습니다. 이분이 좀 오래 살았으면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을 텐데, 바로 뒤에 에이즈로 죽었죠. 그래서 문제의식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근데 철학에서는 인간을 '주체'라고 하지요. 주체라는 것은 세계에 대해 그 위에 있는 것이고, 나, 곧 주체는 1인칭이고 세계는 3인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인칭은 3인칭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인식하고 변형하지요. 나아가 자연을 '자원의 보고'라고 하면서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렸는데, 미셸 푸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간관계 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든요. 또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생각한 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멋있는 말로 하면,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주체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체로 만드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학생을 배려한다기보다, 어떤 개별자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코드에 강제로 뜯어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의무적으로 일기를 쓰지요? 제가 제 조카가 옛날에 쓴 일기장을 봤는데,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햇빛은 쨍쨍, 오늘 맑음, 오늘은 누구랑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오늘의 반성할 점을 꼭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의 반성할 점, "오늘 일기를 내일 썼다". (청중 웃음)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를 감시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편적 코드에서 벗어나는 일을 했으면 고해성사를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잘 이뤄지게 됐을 때 흔히 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철들면 예전에 밖에서 감시하던 것을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감시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사회 코드에 맞게, 자기 사회 필요에 맞게 인간들을 뜯어 맞춰요. 그래서 벗어나면 처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율적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 한때는 타율이던 것이 내재화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여러분들 아마 어렸을 때는 이닦기 굉장히 싫어하셨죠? 그래서 날마다 혼나고 그랬는데, 요즘은 이를 닦지 않고 자면 어떠십니까? 찝찝하잖아요.(웃음) 원래 동물들은 이빨 닦는 거 안 좋아하는데, 이게 내면화되면 오히려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른바 '이제 철들었다', 타율이 아니라 '알아서 하게 됐다', '자율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셸 푸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자율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자율인가 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율이란 게 사실은 내면화된 타율에 지나지 않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내 안에 들어와 체화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잖아요. 군대 갔다 와서 사람된 그 사람, 이건이 근데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이고 그들의 이상입니다. '세계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근데 철학의 이상에 대해 미셸 푸코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현실을 폭로한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있는 의견, 내가 갖고 있는 견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것들도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떠드는 겁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걸 내가 그냥 계속해서 떠드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매클루언 같은 사람이 말한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가 안간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면에서 미디어의 확장입니다.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해버리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자기가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푸코가 볼 때는 어떤 면어서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이고, 의식이라는 것은 담론의 효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푸코는 주체를 객관화, 객체화시켜버립니다. 알고보면 인간이라는 것, 주체라는 것이 거대한 거미줄 망에 걸린 한 마리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허탈해지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우린 뭘 하라는 말이냐. 여기서 미셸 푸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가,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규범적인 문제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이제는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덯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셸 푸코가 바로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에서 끄집어내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갖고 있던 존재 미학을 끄집어냈고, 그래서 푸코의 후기 사상은 인간이 자기를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 내가 나 자신을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느냐를 탐구합니다. 이때 이 사람이 쓰는 '자기'라는 말이 '주체'를 대신한 말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근대 철학에 오염됐다고 생가했기 때문에 불어 '스와(soi)'를 '자기', '자아'라는 개념으로 썼어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드는 그 주체 형성의 방식을 봤더니, 예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앞서 예로 든 일기는 고해성사 형식입니다. 내가 한 일을 쭉 쓰고 나서 바깥의 사회규범과 비교해서 거기서 빗나간 것을 스스로 고해하게 하는 거죠. 그리스 사람들도 일기를 썼는데, 작가들이 쓰는 일종의 착작노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성이 있다기보다, 오늘은 뭘 했는데 책을 좀 덜 읽은 거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책을 좀 더 많이 읽어야지 하는 식이었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개별자를 옹호하고 존중해주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이라는 게 보편적 도덕이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보편에서 시작해서 개별을 규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을 살려주면서 그것을 보편화하는 식의 도덕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푸코는 그것을 다시 되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을 되살리는 데 있어, 존재에 관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적인 측면입니다. 인간 주위를 둘러보면 다 권력이거든요. 권력이라는 게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것이 다 권력입니다. 집안에도 있고, 학교에 가면 학생과 교수 관계고 권력이고, 회사 가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도 있지요.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 행동이 문제가 되면,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굉장히 많은 권력의 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면 굉장히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그야말로 존재를 위해서 자기의 진짜 존재, 곧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정말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는 사람들, 자기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살리려는 사람들은 때로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형태죠. 예컨대 보헤미안 같은 경우는, '보헤미안의 십계명'이라는 게 있어요. 부모를 짚신처럼 알아라, 친구 배신하기를 밥 먹듯 하라 등등.(웃음) 그건 뭐냐 하면 주위에서 자기한테 들어오는 힘들이 워낙 상투화되고 관습화된 권력들이니까 그것들을 다 배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조적 개새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는 기지가 팔요한 것 같아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존재를 형성하는 방식이 덜 강압적이거든요. 그러면서 어떤 면에서는 규정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람들한테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면,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야, 그게 뭐냐, 쪽팔리게"라고 하면, 사람이 나쁜 일은 해도 쪽팔리는 일은 못하는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더 강하게 체면이 구겨진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 강한 규정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욕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 그리스에서는 욕망이 바로 에로스거든요. 자기한테 결여된 것을 바라는 것이 에로스예요.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욕망하지요. 이것은 타동사적으로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욕망은 자동사로서의 욕망, 곧 무엇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욕구 같은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지요. 자기 잠재성을 충분히 펴는 상태가 되고 싶어하는 거지요.
그리스 사람들이 덕이라고 이야기하는 아레테는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행복한 것이고, 그런 상태가 바로 아레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났는데, 예컨데 권력관계라든지 또는 잘살기 위해서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아니면 남들보다 더 높은 지우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살 때, 그리스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덕의 상태가 아니며 매우 불행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프로그래머인데 제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컴퓨터로 한글 문서 작업하고 인터넷 검색만 하는 것은 컴퓨터가 발휘할 수 있는 전체 기능 중에 약 0.0001퍼센트만 활용하는 거라고 합니다.(웃음) 그러니까 컴퓨터 활용의 아레테 상태가 아닌 거예요. 바깥에 있는 무엇에 대한 욕망, 곧 타동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자동사의 욕망이 희생하는 것은 아레테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무엇과 타협해서 어디에 들어가면 뭐가 되고, 뭐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겠죠. 사람들이 저에게 굽실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거든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책 쓰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은 특권층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특권층이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까지 되니까요. 그렇게 살면서 저는 제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동사의 욕망이 아니라 자동사의 욕망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동사의 욕망일 때는 바깥에서 회유나 위협, 예컨대 "너 밥줄 끊어버릴 거야", 아니면 "이거 해줄게"라고 하면서 사람을 망가뜨리잖아요. 그런데 아예 그걸 포기하고 살면, 협박받을 것도 없지요. "밥줄 끊을 거야" 그러면 "끊어봐", 또 "이거 해줄게"그러면 "너나 과자 많이 사 먹어"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뭐랑 똑같으냐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상황을 한번 보세요.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당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물으면서 쳐다보니까, 디오게네스가 "비켜줘. 햇볕 좀 쬐게"라고 했거든요.
알렉산드라는 권력을 비롯해서 모든 걸 가졌지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디오게네스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욕망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알렉산드라가 갖고 있는 게 먹히질 않아요. 남이 부러워해야 자기가 자랑스러워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부러워하거든요. 그래서 결국 알렉산드라는 "내가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로 태오나고 싶다. 그래도 끝까지 대왕이 되고 싶었는데"라고 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개였잖아요. '시미시즘'이라는 말이 원래 개예요. 개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의미죠. 디오게네스가 "나는 개다"라고 이야기했거든요. 대왕은 개가 되고 싶었는데, 개는 대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욕망 자체가 다른 거죠. 대왕이 갖고 있는 정복욕이나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떤 한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됐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자동사로서의 욕망이라는 거죠...
- 진중권, 도서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중 -
Misty moon - 임형주
Misty moon
Misty moon in the still of night
Quietly shed your pale blue light
Promise me not a word to speak
Of the sins in my heart I keep
Silent moon, ever knowing moon
Pray thee tell, will the Time be soon
Just to bring flowers for her hair
Give my Life, only to be fair
Somewhere deep inside my reverie
Hear a voice that calls out to me
Like a long forgotten lullaby
Is this a dream...within a dream
Misty moon bathe me in your glow
Hide the tears, shamelessly they flow
Take me home where my Spirit yearns
Where she lies, wait for my return
안개 속의 달
한밤의 희미한 달
조용히 옅은 푸른 빛을 뿌리는군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내 안의 죄들을
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침묵하는 달.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있는 달
그대에게 곧 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녀의 머리에 꽂기위한 꽃가지를 가지고 가서
내 인생을 드립니다.
내 안의 환상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를 불러내는 소리가 들리네요.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있던 자장가처럼
이것이 꿈 속에서 꾸는 꿈일까요?
안개 속의 달은 당신의 불빛으로 나를 가득 채웁니다.
내 눈물을 숨기고 불빛들을 부끄러움 없이 흐르는군요.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나의 집
그녀가 살고 있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세요.
Misty moon in the still of night
Quietly shed your pale blue light
Promise me not a word to speak
Of the sins in my heart I keep
Silent moon, ever knowing moon
Pray thee tell, will the Time be soon
Just to bring flowers for her hair
Give my Life, only to be fair
Somewhere deep inside my reverie
Hear a voice that calls out to me
Like a long forgotten lullaby
Is this a dream...within a dream
Misty moon bathe me in your glow
Hide the tears, shamelessly they flow
Take me home where my Spirit yearns
Where she lies, wait for my return
안개 속의 달
한밤의 희미한 달
조용히 옅은 푸른 빛을 뿌리는군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내 안의 죄들을
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침묵하는 달.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있는 달
그대에게 곧 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녀의 머리에 꽂기위한 꽃가지를 가지고 가서
내 인생을 드립니다.
내 안의 환상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나를 불러내는 소리가 들리네요.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있던 자장가처럼
이것이 꿈 속에서 꾸는 꿈일까요?
안개 속의 달은 당신의 불빛으로 나를 가득 채웁니다.
내 눈물을 숨기고 불빛들을 부끄러움 없이 흐르는군요.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나의 집
그녀가 살고 있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세요.
▶◀2009년 5월 25일 오전 4시 13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출처 ★야마꼬★ | 야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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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명시 필수
영리적 사용 불가
내용 변경 불가
사람이 나서 살다보면 어떤이들은 자랑스러운 시대를 만들고,
어떤이들은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다.
다음 세대는 이를 평가하여 감사하거나,원망할 자격이 있다.
나는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 한명이 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운역사를 만든 세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세대는 우리를 원망하는것을 주저하지마라
그리고 너희는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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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서 살다보면 어떤이들은 자랑스러운 시대를 만들고,
어떤이들은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다.
다음 세대는 이를 평가하여 감사하거나,원망할 자격이 있다.
나는 부끄러운 시대를 만든 한명이 되었다.
그리고 부끄러운역사를 만든 세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세대는 우리를 원망하는것을 주저하지마라
그리고 너희는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마라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서울 아트 가이드 (5월) '탁계석의 예술산책' 중
서울 아트 가이드 '탁계석의 예술산책' 중
< 클래식에서 사회성 주제의 노래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회를 읽는 눈이 그만큼 부족하고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예술적 권위주의가 숨어 있다..... '우리의 소원', '고향의 봄' 노래하나가 갖는 힘은 그 어떤 정책이나 이념적인 강연보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위대함이 있다. 우리도 민중의 노래가 한때 있었지만 전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은 가사나 노래의 예술성에서 그 만큼 공감이 덜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위대한 작곡가들이여, 명망 높은 예술가들이여, 쉬우면서도 세계를 재패할 수 있는 명곡을, 작품을 좀 내어 놓으시라.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큰 음악은 반드시 쉽고 큰 예술은 필시 간단하다 하지 않던가. 예술성을 가지면서 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하는 예술의 사회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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