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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일 일요일

써니킴_Rollling fog














써니킴
Rolling Fog






현실인듯, 현실이지 않은 듯

기억처럼 안개가 쌓인 뿌연 풍경 속

뒷모습만을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얼굴도 아득하다.

마냥 즐겁다고 표현 못할 기억들,

약간의 공포감과 아련함이 있는 듯 하다.


전시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교복을 입던 세대에 속한 작가는 미국으로 이민간 후 겪은 십대시절의 모호함과 불안정성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미술관 전시 이후 4년 만에 준비한 이번 써니킴의 개인전 Rolling Fog는 그동안의 시간만큼 작가의 심적. 기법적 변화를 포착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써니킴의 작업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 대한 향수를 붙잡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없는 대체물이자 가짜의 시공간인 회화 속 이미지에 여러 겹의 물감 레이어를 덧바르며 몽상적이고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무중력의 공간감이나 공기와 같이, 실체감이 없다는 특성을 가진 가상의 기억은 보는 이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등 감정이입 효과를 주며 회화 안에서 완전한 리얼리티를 얻고 있습니다.

5월, 써니킴의 Rolling Fog전이 안내하는 가상의 기억 속에서 색다른 심리적 경험에 들어서는 즐거움을 기대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장소: 16bungee http://www.galleryhyundai.com/kor/?SiteNum=3

전시일시: 2010. 4. 22 - 5. 12

이광호_Touch

이광호
Touch


섬세하지만 이야기하는 그림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그냥 강하다고 보기엔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식물들.













전시장소: 국제갤러리 www.kukjegalley.com

전시기간: 2010.4.15~2010.5.16

전화 : 02-735-8449

윤명숙의 바다

유난히 깊어보였던 바다 사진.

하늘 위에서 비추는 햇빛은 더욱 소중하고 간절하게 느껴진다.








사진 이미지 : http://blog.naver.com/noongamgo/100104188120

전시기간 : 2010.4.23~2010.5.9
전시장소 : 류가헌 http://www.ryugaheon.com/contents/contact.php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7-10
전화 02-720-2010
로저 딘(roger dean) 회고전



유명 락 그룹의 커버 아티스트 '로저딘'
예스(yes), 유라이어 힙(Uriah Heep)과 같은 전설적 밴드들의 커버를 장식했던 그의 오리지널 작품들과 록, 레이블 작업들을 볼 수 있다.


asia dragon


freyja's castle


dragons dream


blue dessert


asia ppyramid



'테트리스' 게임 디자인을 로저 딘이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70~80년대에 작업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색채와 구성, 캐릭터들이 환상적이다.

다른 블로그에서는 아바타의 배경들을 로저 딘의 작품들에서 차용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로저 딘 홈페이지 : http://www.rogerde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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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대림미술관에서 온라인으로 회원가입을 하시면, 어른 5000원의 관람료를 2000원으로 할인해준답니다.




장소: 대림미술관 http://www.daelimmuseum.org/index.jsp

일시: 2010.3.25(목)~2010.6.6(일)

시간: 오전 10시~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2009년 7월 26일 일요일

장 뒤뷔페 '우를루프의 정원'

"제가 봤을 때

그림의 쓰임새를 흔히들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각자의 집에다 둘 수 있고,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고,

영원히 볼 수 있는 그림이 되는 거죠.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혹은 타오르는 불을 보듯이요.



나는 내가 전문가가 아닌 애호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그러길 바래요.

내가 원하는 건 단지, 하고싶을 때 아무런 구속없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고기를 낚는 낚시꾼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오직 그림에서 찾은 즐거움 때문이죠.

내 그림은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제야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단 생각이 듭니다.

전혀 새로운 빛 속에서 이들을 보는 것 같고,

안 보이던 게 보이는 것 같지요.

신기한 마술 안경이라도 쓴 것같은 기분입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두 눈은 아무것도 못 보죠.

그림이 내 눈이 되는 겁니다.

시골길에서 돌멩이 하나를 봐도,

뭘 본건지도 모르겠고, 뭘 아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아 그게 돌멩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집에와서 그림을 그리려고 한 때입니다.



그리고... (집과 나무와 밭이 있는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보며)

저런 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뭐가 예쁜 건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제게 있어선

거슬려 보입니다. 그럴 이유는 없지만요.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싫어하는 것도 화폭에 담지요.

그러면서 내 안의 감정을 비워내는 겁니다.



미의 개념이란 없다고 봅니다.

아름답다는 건 착각이죠.

미추의 개념 모두가 없어요.

시대에 맞게 사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이죠.

미란 사회적 통념일 뿐입니다.

한가지 유효한 개념이 있다면 그건 매혹, 즉 홀리는 것이죠.

장담컨대,

그 어떤 사물이든

그 어떤 존재든

그 어떤 장소든

강한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거지요.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빠져들게 하는 겁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그게 아름답다고 하는 거죠.

하지만 뭐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제 생각엔

예기치 못한 데서 미를 찾는게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은 눈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영혼에 대고 말하는 겁니다!"







- 장 뒤뷔페, 인터뷰 中









장 뒤뷔페의 전시가 끝나기 이틀전 부랴부랴 전시를 봤다.

저녁 6시가 넘어서도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장 뒤뷔페, 참으로 재능이 다양해서 초년기에는 어느길로 가야할지 이리저리 헤메이다가

중년기가 되어서야 자신의 길을 찾고 죽을 때까지 미술가가 된 사내.

아카데믹한 화풍은 배우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그리겠다며 미술대학을 뛰쳐나왔지만,

그후로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42살까지 포도주 상인이 된 사내.

이 사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42살, 미술가가 되길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 그동안 못그려 본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동안 얼마나 멋진 생각을 화폭에 담아보지 못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장 뒤뷔페의 그림들은 찡하고 통하는 면이 있다. 그걸 화가의 진실성이라고 했던가, 진실이 담겨 있는 그의 그림들은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그 어떤 현대 회화보다 가슴으로 먼저 다가선다. 정말 장 뒤뷔페의 그림들은 영혼에 대고 말하는 듯 하다.

개전

예술의 전당의 '개전'을 다녀오다. 개들이 왕왕 울부짖는 '개판'다운 전시회. '개'를 이해해보고, '개와 인간'을 뒤집어보고, '개'의 입장에서 이야기해고, '개'를 다시 만들어보았던 전시회. 한가지 소재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작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음.


'개전' 앞줄에 적혀있는 글들


<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이고,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학생은 훌륭하다'는 확신과 믿음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자세와 노력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새로운 자기(나)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혁명이 되어야 한다>


<프로젝트의 중요한 사명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미지 생산'과 '의미생산'을 통해 사회에 대한 말걸기이다>


<세상앞에 우뚝서는 연습을 하려면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난을 자청함으로써 가능하다>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큐브릭이 찍은 시카고

http://www.chicagotribune.com/news/custom/photos/gallery/chi-kubrick-photogallery,1,3753405.photogallery?coll=chi-news-hed&index=1

<미술로 보는 20세기>중 '사르트르와 자코메티'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 또는 인간의 의식은 '무(無)'이다. '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존재 방식의 특수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의식은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대상으로 파악되는 순간, 의식이 아니다. 경험과 판단의 주체이지 객체가 아닌 까닭이다. 반면에 사르트르에게 '존재'라는 말은 의식 주체로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대상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다시 전자를 대자(對自), 후자를 즉자(卽自)라고 불렀다. 인간은 사과나 개, 건물 등의 사물처럼 경험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사과나 개, 건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존재, 그것 자체로서 충족된 존재다.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늘 결핍돼 있다는 뜻이다. 의식은 늘 무언가를 바란다. 인간은 이렇듯 결핍돼 있으면서 충족된 존재를 경험하고 지향한다. 나아가 신이 되기를 꿈꾼다. 신은 대자이면서 동시에 즉자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대자와 즉자로 구별될 때 어느 한쪽만으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요청한다. 그러므로 완전자(신)는 의식이며서 동시에 대상이어야 한다. 인간은 그 지점을 꿈꾼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비록 의식이 무언가를 늘 지향하지만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곧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먹고 싶은 저 사과는 맛있는 사과일지언정 그 자체가 동시에 나의 의식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은 다시 '무'가 된다.
이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위치를 자코메티는 <장 주네의 초상>에서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장 주네는 사르트르 못지 않게 자코메티와 가까웠던 실존주의 문인이다.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코메티는 모델의 눈동자 부근을 흐리게 처리해 마치 안구가 사라진 듯 묘사하는 한편 대머리를 강조해 해골의 인상을 강하게 살렸다. 앞서 소녀를 그리다가 그의 응시에서 실존을 발견했던 자코메티의 경험을 상기한다면, 모델을 포함해 모든 것을 동일한 색상으로 삭막하게 처리하고 인물의 눈동자만을 비운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응시'는 이 작품 전체의 주제다. 부러 육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의식이면서 동시에 대상'일 수 없는 '시선=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표현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지금 관자(觀者)를 '실제로' 쳐다보는 살아있는 시선을 그리려 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 자체는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고 의식은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이 '육체의 사물성'을 고도로 강조해 역으로 '산의식'을 드러내 보이려 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듯 의식을 주제로 했음에도 의식이 그려지지 않은 것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식만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인 인간에게는 '너는 사실상 존재의 근거가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자코메티가 자기 동생을 모델로 제작한 <디에고>역시 '무'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것들과 달리 가슴 부분의 양괴감이 무척 강해 '존제'의 느낌 또한 적지 않다. '무'와 '존재'가 중첩돼 있는 것이다. 가슴 부분의 물량감은 가늘고 긴 입상들의 두터운 받침대에서 연장돼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상의 두툼한 받침대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받쳐주는 기능과 함께 즉자 곧 사물을 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대지 혹은 세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연상 외에 한 가지 연상을 더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곧 '타인'의 존재다.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은 '무'이면서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물 즉 즉자로 본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대자이다. 대자가 다른 대자를 즉자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어떤 의식이든 스스로가 사물로 취급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따라서 서로를 사물로 취급하는 인간은 상호 적대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식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대상으로만 파악한다. 나에게는 나의 의식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의 순환은 끝이 없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 대한 초기 사르트르의 비관저 설명이기도 하다.
가느다란 실루엣의 인간은 관자인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지만, 이렇듯 가슴이 두터운 인간이 우리에게 위협감을 주는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지금 즉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모델과 우리 사이엑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 모델도 우리를 하나의 사물로 볼 것이다. <디에고>는 종국적으로 이런 존재와 무의 긴장 속에 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 아무 근거도 없는, 하나의 우연에 불과한 인간들이 서로를 사물로 보면서 영원한 갈등을 일으킨다. <디에고>는 한마디로 영원한 고독과 부조리로서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 누가 나을 것이 없는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이주헌,<미술로 보는 20세기>中